미국 보잉의 787 드림라이너(꿈의 항공기) 제트기가 연말에 첫 비행을 할 예정이다. 2년 전 첫선을 보였을 때 주문이 600대에 육박해 초고속 판매기록을 세운 기종이다. 요즘 흔히 보이는 보잉 777의 동체엔 알루미늄 합금이 주로 쓰이지만 보잉 787은 탄소섬유 등 신소재를 50%, 알루미늄 합금을 15% 사용한다.
보잉 787 동체와 날개는 신소재 덕분에 4배 강해졌고 무게는 15% 줄었다. 연료소비효율은 20% 개선되는데 그중 3분의 1이 탄소섬유 덕분이다. 탄소섬유를 거푸집에서 구워내는 방식으로 동체를 만들기 때문에 종전처럼 알루미늄 판들을 연결하는 5만 개의 볼트나 리벳이 필요 없다.
탄소섬유는 일본 3개사가 세계시장의 78%를 장악하고 있다. 선두기업인 도레이는 보잉에 2021년까지 16년간 60억 달러(약 7조 원)어치를 납품하며, 보잉의 경쟁사인 프랑스의 에어버스에도 필요량의 절반을 공급한다. 탄소섬유 가격은 무게가 같은 의류용 섬유의 20배나 된다. 도레이는 최근 수년간 도요타자동차와 함께 탄소섬유 자동차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도레이가 탄소섬유를 개발한 것은 사실상 한국 때문이다. 1960년대 말 화섬 분야에서 한국과 대만 섬유업계에 밀린다는 위기감에 비상구를 찾아 나선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엔 탄소섬유로 골프채나 낚싯대를 만드는 수준에서 고전했지만 20여 년만인 1990년대 이후 커가는 시장을 즐길 수 있었다. 작년엔 총매출 1조6500억 엔(약 21조3000억 원) 중 탄소섬유 등 신소재 부문 비중이 60%를 넘는다.
일본 업체로부터 시장을 넘겨받아 20여 년 호황을 누린 국내 화섬업체는 하필이면 설비를 늘린 직후인 1990년대 말 저임금을 앞세운 중국 업체에 쫓기고 만다. ‘섬유 사양산업’ 논란과 ‘공장의 탈(脫)한국’ 논란이 계속되던 2000년대 초, 국내 업체들도 도레이처럼 훗날 주력부문이 될 돌파구를 찾았을까. 타이어 보강재와 스판덱스(효성), 아라미드섬유(코오롱), 나노섬유(나노테크닉스) 등 신섬유로 국제경쟁력을 확보한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한때의 ‘섬유강국’답지 않게 초라하다.
하명근 섬유산업연합회 상근부회장은 “섬유에 정보기술(IT) 나노기술(NT) 바이오기술(BT) 환경기술(ET) 우주항공기술(ST) 문화기술(CT) 등 6T를 접목하면 고부가가치화 차별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관련업계는 외국의 비슷한 사례를 제시하면서 신섬유 개발을 위한 재정 1조 원 지원을 요청하고 있지만 그에 앞서 기술개발을 계속할 확고한 의지를 보일 필요가 있다.
도레이는 ‘첨단재료로 세계 톱 기업’이라는 목표로 지금도 초대형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2006년부터 내년까지 5년간 설비투자에 6000억 엔(약 7조7000억 원), 연구개발(R&D)에 2400억 엔(약 3조1000억 원)이 들어간다. 전체 투자 중 R&D 투자 비중이 29%나 되고 R&D의 80%를 첨단재료에 배정하는 데서 기업의 목표의식을 읽을 수 있다.
일본 기업은 불황 때도 삭감 유혹을 떨쳐내고 R&D 투자를 계속한다. 국내 업체에 뒤졌다는 평가를 듣는 일본 9개 전자업체도 작년 매출이 2007년보다 12.5% 줄었어도 R&D 투자는 3.5%만 줄였다.
일본은 섬유처럼 전자 IT부문에서도 완제품 시장은 추격자에게 넘겨주더라도 심장 격인 핵심부품 소재를 꽉 쥐고 짭짤한 수익을 챙긴다. 우리가 배우기도 하고 깨기도 해야 하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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