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유학생회 탄일축하식-일본 동경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에서는 지난달 28일 밤 여섯 시 반에 신뎐(神田)구에 있는 중국기독교청년회관에서 성탄절 축하식을 거행하였다는데 모인 사람은 600여 명에 달하야 성황을 이루였으며….” ―동아일보 1925년 1월 4일자》 일본과 미국에서 근대 교육을 받은 최초의 유학생은 같은 사람이다. 유길준(1856∼1914)은 1881년 ‘조사시찰단’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했다가 게이오 의숙에 들어가 한국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됐고, 1883년 보빙사(조선에서 최초로 미국 등 서방 세계에 파견한 사절단) 수행원으로 미국을 방문했다가 ‘거버너 더머 아카데미’에 입학해 한국인으로는 첫 미국 유학생이 된다.
20세기 초 급격한 근대화와 함께 새 지식에 대한 지식인들의 갈망이 높아지면서 유학생들의 수도 늘었다. 신문에 실린 졸업 기사가 당시 유학생 수를 알려준다. “동경의 각 전문 이상 대학을 마치는 영예의 졸업생은 일본대학의 40명을 최고로 전부 52개교에 359명에 달한다.”(1930년 3월 13일 동아일보) “미국 조선류학생회의 조사한 바에 의하면 현재 북미에 유학하는 조선학생 총수가 303명이라는 바…남학생은 261명, 여학생은 42명이다.”(1929년 2월 28일 동아일보)
유학생들은 해외에서 배운 문물을 국내에 전파했다. 강연회와 토론회, 연극 등 문화 행사를 펼치거나 야구, 축구, 농구, 스케이트, 보디빌딩을 비롯한 여러 서양 스포츠를 선보였다. 하지만 유학생들이 민족정신을 고양할 것이라는 점을 우려한 일제는 감시와 탄압에 나섰다.
“동경류학생강연단 주최 중의 동아일보 평양지국 후원의 강연회는…16일 정오에 돌연히 평양서로부터 돌연 금지를 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동 강연회의 연사들이 평천리에서 강연한 말이 불온하였다는 것이라더라.”(1927년 8월 18일 동아일보)
일제는 이윽고 ‘사상(思想)경찰’을 만들어 유학생 감시에 나섰다. 1928년 8월 8일 동아일보 기사는 “새로 생긴 사상경찰은 일착의 시금석으로 주목하는 것은 일본 각지에서 하기방학으로 건너오는 류학생들에 대한 감시라고 한다.…휴가에 돌아오면 각지에서 각종의 회합을 개최하야 지방민과 소년, 청년계의 문화 개발에 노력하는데 이러한 기회에 불온한 사상을 선전함이 없는가 하야 당국에서는 늘 두통으로 생각한다”고 전했다.
1920, 30년대에는 해외에서 학위를 따면 신문에 이름이 실릴 만큼 유학생이 귀했지만 2008년 해외 대학교에 유학 중인 한국인 학생(석·박사 포함)은 21만6867명에 이른다. 조기유학 붐까지 일어 1995년 2259명이던 초중고교 유학생은 2006년 2만9511명으로 늘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한국의 교육 제도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 대통령은 “속된 말로 거지도 아이 교육은 시킨다. 가난의 대물림을 끊으려고 교육은 시킨다”며 “그런 저력이 한국 경제를 성장시킨다”고 답했다. 유학을 둘러싼 논란도 있지만 한국 유학생이 해마다 늘어나는 이유는 이 같은 부모들의 교육열이 있기 때문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