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이사도라 덩컨으로 불리던 무용가 최승희는 지금 남아 있는 흑백사진으로 보아도 춤사위가 고혹적이다. 최승희가 치마저고리를 입고 장구를 메고 나와 춤을 추기 시작하면 조선인들은 객석에서 함성을 질렀다. 조선이 국권을 잃은 다음 해인 1911년 출생한 이 여인은 격동의 시대를 살며 춤의 세계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최승희는 1941년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지원병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 ‘그대와 나’ 시사회에서 무용을 공연했다. 다음 해에는 일제의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기 위한 무용공연에서 “우리 무적 황군(皇軍)이 싱가포르 공략에 성공하고 있는 이때 무용으로 그 기쁨을 축하하게 된 것을 참으로 광영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1943년에는 중국 일대에서 일본군 위문 순회공연을 했다. 최승희는 일본군을 위한 국방기금 명목 등으로 7만5000원을 헌납했다.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됐던 최승희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규명위) 명단에서는 빠졌다. 규명위는 ‘친일행위는 인정되지만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드물게 조선 문화를 세계에 알린 점 등이 고려되어 기각됐다’고 밝혔다. 시 소설과 언론을 통해 민족을 깨우치고 우리말과 글을 빛낸 지식인들에게 글 한두 편, 시 몇 편 때문에 친일이라는 딱지를 붙여놓은 것에 비하면 매우 관대한 처분이다.
7만5000원은 봐주고 300원은 친일
최승희가 조선 춤을 보급한 공이 있다지만 일본 춤의 창작과 소개에도 공을 들였다. 일본풍 무용 ‘무혼(武魂)’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제1회 문화표창작품으로 선정됐다. 1948년 11월 민족정경문화연구소가 간행한 ‘친일파 군상’에 최승희는 ‘몸과 마음을 바쳐 무용을 통한 보국노력에 힘쓴’ 인물로 평가됐다.
일제말기 초등학교 교사 월급이 45원 정도였으니 국방헌금 7만5000원은 거금이다. 규명위는 인촌 김성수 전 부통령이 군용기 건조비로 300원을 헌납했다고 적시했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7만5000원은 수십억 원에 해당하는 돈이고 300원은 1000만 원 정도 될 것이다. 인촌의 재력이나 민족사업에서 보여준 씀씀이에 비하면 유난히 ‘인색한 헌납’이었다.
최승희는 일본군 위문공연을 다니며 찍은 사진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남아 있다. 그에 대해 동정론을 펴자면 조선인 무용가가 기부금을 안 내고, 황군 위문공연도 거부하고 도쿄와 서울의 극장에서 공연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촌의 경우 학병을 권유하는 글과 집회에 참석한 근거라고 규명위가 제시한 것은 날조기사로 민심을 현혹하던 총독부 기관지뿐이다.
학교와 언론사를 운영하고 산업 활동을 하던 인촌으로서 최승희 헌납금액의 0.4%만 낸 것은 어떻게 보면 어렵사리 버틴 것이다. 규명위는 조선 문화에 관한 최승희의 공로만 인정하고 교육 언론 산업을 통해 민족의 힘을 육성한 공로는 왜 무시하는가. 그래서 친일인명사전이나 규명위의 명단이 친북좌익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한 인사들에 대해서는 가혹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최승희 부부는 광복 후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위해 일했다. 남편인 문학평론가 안막은 1930년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자였고 광복 후 월북해 1950년대 중반 문화선전부 부상(副相)을 지냈다.
최승희는 1946년 남편을 따라 월북해 김일성의 특별대우를 받았다. 북한 중앙조선 TV의 올해 8월 보도에 따르면 김일성은 최승희 부부를 위해 대동강변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려주었다. 최승희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무용학교 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을 역임했고 공훈배우 인민배우의 명예칭호를 받았다. 최승희를 북한에서 극진히 예우하며 선전에 활용한 것을 보더라도 북한이 친일을 철저하게 청산했다는 좌파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사실 왜곡이다.
표면만 보고는 실상 판단 못해
충무공 이순신의 유적 보전 운동에 앞장섰던 인촌의 뜻이 친일에 있었는지, 항일과 극일에 있었는지는 분명하다. 인촌은 군용기 건조비 헌납금 300원의 10배, 100배 되는 돈을 써 아산 현충사를 중건해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행주의 권율 장군 기공사(紀功祠)를 중수했다. 인촌은 1945년 2월 일제의 귀족원 참여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나는 최승희가 뼛속까지 친일이었던 무용가라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규명위가 왜 최승희에 대해서는 공을 배려하고, 다른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서는 공과 과를 공평하게 저울질하지 않았느냐는 점을 따지려는 것이다. 국내 거주 인사들이 위장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던 엄혹한 시기의 행적에 대해 규명위는 일부 측면만을 보고 편파적인 칼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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