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동원]마천루의 저주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2일 03시 00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뉴욕에 위용을 드러낸 때는 1931년. 공교롭게도 미국 대공황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때와 겹친다. 1970년대 중반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시카고의 시어스타워가 세계 최고층으로 자리매김한 직후엔 오일쇼크가 발생해 미국경제가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이뿐만 아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타워가 세계 최고 기록을 갈아 치운 1998년 무렵엔 아시아에 경제위기가 찾아왔다. 이어 대만이 2004년 야심 차게 세계 최고층으로 등극시킨 타이베이금융센터를 세울 무렵 대만의 주력산업인 정보기술(IT) 분야가 침체를 겪은 것은 우연치곤 흥미롭다.

천문학적 자금이 들어가는 초고층 빌딩 건설은 돈줄이 풀리는 통화정책 완화 시점에 주로 시작된다. 거대한 빌딩의 완공 무렵엔 경기과열이 정점에 이르고 마침내 거품이 꺼지면서 결국 불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설이 있다. 말하자면 경제학의 경기순환론과도 맥이 닿아 있는 얘기다. 호사가들은 이 현상을 ‘마천루의 저주(skyscraper curse)’라고 자극적으로 부른다. 서울 여의도 63빌딩이 결국 임자가 바뀔 당시 마천루의 저주가 한국에도 찾아 왔다는 농(弄)이 나왔었다.

이번 두바이 사태는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지만 세계 최고의 금융·관광허브(중심)가 되겠다는 욕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실제로 두바이의 주요 사업에는 ‘세계 최대’와 ‘세계 최고’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세계 최고층 건물(버즈 두바이)을 비롯해 세계 최초의 수중호텔(하이드로 폴리스) 세계 최대 인공섬(팜 주메이라) 세계 최대 인공해양단지(워터프런트)에다 최대 테마파크를 꿈꾸는 두바이랜드까지 ‘최고 퍼레이드’는 이어졌다.

버즈 두바이를 착공한 2004년 두바이엔 중동 국가의 오일머니와 서방 금융기관의 돈이 몰려들었다. 세계 최고를 만들겠다는 욕심이 생길 법도 했다. 이때가 두바이에 ‘허브병(病)’이 찾아온 시기라는 진단도 나온다.

누가 뭐래도 두바이는 상전벽해를 현실로 만든 곳이다. 두바이 지도자들의 상상력과 창의성이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이유다. 하지만 밀물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위기상황이 올 수 있다는 ‘시나리오 경영’을 소홀히 한 점은 퍽 아쉬운 대목이다. 내실 없이 외부 지원만으로는 결코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간과한 셈이다.

두바이가 최고의 허브가 되겠다는 슬로건을 내거는 동안 이웃 토후국인 아부다비는 화려한 구호 대신 상대적으로 내공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계의 주목을 덜 받은 아부다비에 두바이의 운명이 달렸다는 건 아이러니이기도 하지만 곰곰이 씹어봐야 할 점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창 의욕적으로 진행 중인 새만금이나 송도 경제자유구역도 아시아 최고 허브를 앞세우고 있다. 꿈의 허브를 내건 서울 용산 국제업무지구는 4, 5년 후 150층의 초고층빌딩을 완공할 예정이다.

최고 최대라는 허상에 몰입되면 차입경영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한국에서 진행되는 각종 프로젝트가 내실을 다지면서 경제성장의 디딤돌이 되기를 주문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 두바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메시지는 이것이 아닐까 싶다.

김동원 국제부 차장 davi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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