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세계사 분야의 석학 데이비드 크리스천 교수가 두 달간 한국에 머물렀다.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대학 프로그램 덕분이다. 크리스천 교수는 경복궁 궁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호텔에 투숙해 우리 고궁의 멋을 한껏 즐겼다. 매일 아침 운동 삼아 청계천까지 산책하며 서울의 활력과 역동성에 감탄했고 강남대로를 걸으며 밤늦도록 휘황찬란한 도시문화에 탄복했다. 또한 강화도와 경주를 답사하곤 경탄과 호기심을 끝없이 발산했다.
우리나라를 방문하기 이전엔 그는 친한파는커녕 지한파도 아니었다. 러시아사와 중앙아시아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덕분에 한국을 조금 알고 있었을 뿐이다. 환갑을 훌쩍 넘긴 이 노교수는 김치와 된장국을 비롯한 한국음식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고, 기꺼이 자비를 들이면서까지 한국어 습득에 열의를 쏟았다. 그리고 어느 곳에 가든지 항상 한국어 용례집과 영문 여행안내서를 옆에 끼고 다녔다.
한번은 경복궁을 샅샅이 둘러보며 강녕전(康寧殿) 마루에 앉아 쉴 때였다. 크리스천 교수는 경복궁에 대한 설명을 보라며 여행안내서를 내밀었다. 그는 경복궁을 ‘지루한(boring)’ 곳이라고 표현한 문장을 가리켰다. 누가 작성했는지 몰라도 엄청나게 잘못된 내용이라는 표정이었다. 불현듯, 경복궁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가 외국인에게 어떻게 설명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세계사에 한국 고대사 존재안해
근래에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 때문에, 외국 교과서나 인터넷상의 역사사실 오류나 왜곡에 대해 매우 민감해졌다. 적어도 일본해와 더불어 동해가 병기되도록 하고 다케시마(竹島)나 리앙쿠르 암석(Liancourt Rocks)이 아니라 독도(Dokdo)로 표기하도록 하며, 비록 현재는 중국 영토이지만 고구려와 발해는 우리의 고유한 역사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외국 교과서 오류 시정사업을 위해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에 국제한국문화홍보센터를 설립했고 인접 국가와의 역사문제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위해 동북아역사재단도 출범시켰다.
역사 전쟁은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외국 세계사 교과서에서 4, 5세기 이전의 한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반도를 점령한 한(漢)이 물러나간 이후에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건설되었다는 주장이 압도적으로 세계사 학계에 횡행하기 때문이다. 기원전 1세기의 삼국수립을 설명한 제대로 된 세계사 교과서는 극히 드물다. 또한 고대 중국과 일본은 ‘문명(文明)’으로 평가되지만 한국은 ‘(농경)사회’로 폄하된다. 물질적 진보, 제도적 독특성, 문화적 창조성이 없는 한국은 중국 문명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 최고(最古)의 현존 목판인쇄물(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활자 인쇄물(직지심경), 고도(高度)의 불교와 유교 문화는 철저히 무시된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와 과학기술 업적은 어떠한가? 우리는 문화 민족의 독창성을 강조하지만 외국 세계사 교과서는 여말선초 시기 몽골제국의 과학기술 전수에 기인한다고 강조한다. 미국에서 판매부수가 가장 많으며 과학기술의 발달에 초점을 맞춘 한 세계사 교과서(휴턴미플린 출판사)가 1100쪽에 이르는 전체 분량 중 한국사와 관련해 가장 많이 할애한 내용(1쪽 반)은 바로 몽골의 과학기술 전수에 관련된 부분이다.
몽골제국의 덕택으로 잠시 진보를 이뤘지만 19세기 말까지 여전히 중국의 거대한 영향 밑에 있다가 일본에 의해 근대화되고 6·25전쟁 직후 경제강국으로 등장하는 국가. 거부하고 싶지만 이것이 세계사 학계의 일반적인 한국 이미지다. 크리스천 교수가 한국에 체류하며 경험한 한국문화와 역사에 경탄해마지 않았던 역설적인 배경이기도 하다.
글로벌 경제이어 역사 세계화를
나무를 봐야 할 때도 있지만 숲 전체를 봐야 할 때도 있다. 역사사실의 오류와 왜곡을 바로잡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세계사 맥락에서 우리 역사 전체가 제대로 평가받는 일이다. 우리 역사를 좋게 평가한 조각만 대서특필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 일은 독재시절 국민 호도의 목적으로나 사용하는 품격 없는 짓이다. 진정성 있는 역사연구가 되려면 한국사와 세계사의 상호보완적이며 융합적인 관점에서 한국사 전체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세계사는 국가 역사의 각축장이다. 세계사 학계에서 설득의 패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한국 역사의 위치가 달라진다. 졸부의 국가 이미지가 아니라 수준 높은 문화 국가의 이미지는 국민 개개인의 자부심을 넘어 국가 전체의 국제 경쟁력에 현저한 영향력을 미친다.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도 세계사 속의 한국사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글로벌 전략하에 국가 이미지와 세계사의 가치를 포괄적으로 성찰해야 할 때다. 조지형 이화여대 교수·미국법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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