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과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인가. 20세기 중동 최대의 화두에 도전장을 던진 나라가 터키였는데 1923년 공화국 수립 이후 86년간 줄곧 이슬람식 민주주의의 모델을 창출했다. 터키가 지금은 이슬람과 민주주의라는 두 마리 토끼 사이에서, 1400년 이슬람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기로에 서 있다. 하나는 유럽연합(EU) 가입을 통한 이슬람과 서구의 통합이라는 도발적인 정치실험이고 다른 하나는 정부 전복 쿠데타 음모가 드러난 소위 ‘에르게네콘 사건’으로 인한 이슬람 정권과 군부 사이의 명운을 건 한판 승부이다.
국민 98%가 이슬람을 믿는 터키가 2005년 10월 EU 가입을 위한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슬람 세계와 유럽 모두 가능성을 높게 보지 않았다. 기독교를 공통분모로 하는 EU 공동체가 이슬람 국가인 터키를 받아들일 리가 없고 지난 400년간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은 유럽국가와의 역사적 앙금이 강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7000만 터키 인구의 이동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교란과 유럽 최대의 군사력을 갖춘 터키의 잠재적 위협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그러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기도 한 터키는 지난 4년간 대대적인 구조개혁과 사회혁신으로 EU 가입에 필요한 31개의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심지어 종교적 관행인 이슬람식 도축방식도 유럽의 권고에 따르고 1996년 간통죄에 이어 2002년에는 사형제까지 폐지하면서 과감한 사회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EU 가입을 위한 3대 정치적 걸림돌인 그리스와의 키프로스 문제, 쿠르드 소수민족 박해, 아르메니아 학살문제 등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던 민감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본격적인 노력도 가속화했다. 서구와의 뿌리 깊은 대립과 갈등에 시달리고 참수형과 간통죄에 대한 잔혹한 투석형이 묵인되던 이슬람 사회의 입장에서 보면 터키의 태도는 거의 혁명적 변화에 가깝다.
그런데 에르게네콘 사건이 터키의 발목을 잡았다. 세속주의 지식인, 지하조직, 군부가 깊숙이 개입된 이 사건은 이슬람적 가치를 표방하는 집권 정의개발당 정부를 전복하려는 쿠데타 음모다. 배후에 군부의 개입 흔적이 속속 드러나면서 전직 참모총장과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증인으로 출두하는 고강도의 조사를 검찰이 진행 중이다.
터키 헌법의 근간인 세속주의의 신봉자임을 자처하던 군부는 전통적으로 이슬람 정치세력과 날선 대립각을 세우면서 언론과 국민 지지를 바탕으로 막강한 정치권력을 휘둘렀다. 그런데 EU 가입과 서구식 사회개혁이라는 전유물을 오히려 이슬람 집권당에 뺏기면서 군부는 적지 않게 당황한다.
전통적으로 터키 정치는 삼권분립이라기보다는 사권분립형에 가깝다. 형식상으로는 군이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지휘를 받지만 3차례의 군사쿠데타 그리고 민간인 국방장관의 공식 서열이 합참의장보다 아래인 점을 생각하면 군부가 독자적인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가 이끄는 집권 정의개발당은 EU 가입을 무기로 군부의 정치 참여를 억제하고,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과감한 개혁을 강화하려 한다. 이슬람의 종교적 가치와 전통을 지키면서 서구와의 통합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놀라운 발상이다. 튀니지나 모로코 같은 이슬람 국가도 EU 가입을 희망하므로 터키의 정치실험은 다른 이슬람 국가에 시금석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나아가 9·11테러 이후 문명 간 충돌 담론이 팽배한 가운데 이슬람권과 서구 유럽의 실질적 통합이라는 인류사의 새로운 장을 연다는 점에서 특별한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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