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조은아]실패서 혁신 찾는 美벤처문화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9일 03시 00분


2001년 어느 봄날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학생이었던 릭 풀럽 씨는 어느 겨울보다도 더 추운 봄을 맞고 있었다. 25세였던 그의 경력은 2개 벤처회사의 경영 실패와 1000만 달러(약 115억 원)에 이르는 자금 손실이 전부였다.

당시 MIT에서 ‘신생기업(New Enterprises)’ 강의를 맡았던 벤처캐피털리스트 하워드 앤더슨 씨는 이미 풀럽 씨에게 투자해 실패한 경험이 한 차례 있었지만 선뜻 자기 사무실 한쪽 공간을 내줬다.

황금 같은 기회를 얻은 풀럽 씨는 그곳에서 에너지 사업을 연구하는 데 몰두했고 결국 ‘배터리 기술’ 분야에서 사업 가능성을 발견했다. 탄소 나노튜브를 활용한 전지회사를 설립하자는 그의 아이디어에 동업자들이 생겼고 그해 ‘A123시스템스’라는 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 회사는 총 2억5000만 달러 이상의 자금을 모아 중국과 한국 등지에 공장만 6개를 둔 글로벌 회사로 성장했다.

지난달 17일 기자에게 A123시스템스의 ‘올챙이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 MIT 기업가정신센터 호세 파셰코 매니저는 “앤더슨 씨는 풀럽 씨의 1000만 달러 손실이 1000만 달러짜리 교육이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실패를 하더라도 무언가 배울 수 있게 하기 위해 다시 기회를 준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와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 등을 길러낸 보스턴 인근 명문대를 취재하며 화려한 성공신화가 가득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3일간의 취재 끝에 취재수첩에 남은 건 각양각색의 실패 후기였다. 보스턴 인근 밥슨칼리지에서 기업가정신을 강의하는 에릭 노이스 교수는 “수업에 들어온 학생들을 평가할 때 실패의 원인을 깨닫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실패의 가치는 실제 기업의 채용시장에서도 존중받고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MIT 졸업생 권용환 씨는 “미국 기업의 입사 면접에서 단골 질문은 ‘언제 실패했으며 실패에서 배운 게 무엇인가’이다”라며 “입사 지원 전 공백기가 있거나 시험에 실패한 경험이 있어도 이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 설명한다면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라고 전했다.

권 씨의 말을 듣는 순간 최근 국내 언론의 기사가 씁쓸하게 떠올랐다. 졸업 후 공백기가 있으면 입사원서조차 낼 수 없었던 어떤 대기업에 앞으로는 졸업연도와 상관없이 응시할 수 있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 사회에도 실패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안정된 일자리를 추구하기보다 스스로 창업을 하거나 마음껏 창의성을 발휘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질 것이다.―보스턴에서

조은아 산업부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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