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희 노동부 장관은 현 정부의 실세이자 전략을 겸비한 인물이고 전임자들과는 달리 노사관계의 원칙을 중시했다. 그런 면에서 국민의 기대가 어느 때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노동부는 몇 달 전만 해도 복수노조, 전임자 관련 정책에서 혼선을 빚던 모습에서 벗어나 이익집단과 정치집단의 공세와 압력을 굳건히 견뎌냈다. 해당 부처 관료들도 임 장관의 리더십을 칭찬했다.
하지만 지난주 노동부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노총의 3자 합의문이 발표되는 순간은 충격 그 자체였다. 합의안은 ‘이번 합의를 전제로 새로운 노사관계를 이끌어내고 21세기 선진 일류국가로 도약하는 데 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는 근사한 말로 시작하지만 골자는 복수노조 2년 6개월 유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6개월 유예였다. 2006년의 무조건 유예와 달리 이번 합의는 시행을 위한 교섭창구 단일화 원칙을 조속히 법제화하기로 한 점은 진일보했지만 복수노조가 2012년 7월부터 자동적으로 시행된다는 보장은 여전히 없다. 이번 자동시행 합의가 노사정의 진정한 약속이라면 한국노총과 경총은 2012년 이후 더는 유예가 없을 것임을 국민에게 약속해야 한다.
노사관계 원칙대응 기조 무너져
임 장관은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13년간 유예를 조장한 노사를 비판하며 이번만큼은 복수노조 허용과 창구 단일화, 그리고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하늘이 두 쪽 나도 실시하겠다며 대쪽같은 태도를 견지했다. 지금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노사정 3자 합의문은 ‘선진 일류국가 도약’과 같은 정치적 수사로 포장됐지만 국민은 당혹스러울 뿐이다.
이명박 정부가 공공부문에서 과도한 전임자 수와 편의 제공을 과감히 뜯어고치려는 자세로 나가고 민주노총의 불법파업에 법과 원칙을 가지고 대응하면서 최근의 노사관계는 법질서를 회복해 가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원칙적 대응이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해 노동계의 파업 동력도 급속도로 약화됐다. 파업을 벌이던 철도노동조합의 백기투항이 좋은 사례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부가 2010년 복수노조, 전임자 관련 노사관계 개혁과제를 추호의 흔들림 없이 실시하겠다던 약속을 뒤집어버린 것이다. 민주노총에는 법과 원칙을 강조하면서 한국노총과 유예 합의를 하는 것도 이중적이다. 노사관계 원칙을 모든 집단에 예외 없이 공정하게 적용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유예를 준비기간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노동부가 사전에 천명한 복수노조 허용 유예기간 마지노선인 1년이 무너지고 2012년 7월까지 2년 6개월이 유예됐다는 점이다. 2012년은 4월에 총선, 12월에 대선이 있는 정치시즌이다. 아무리 이명박 정권 임기 내라 하지만 노사는 다시 차기 대통령 후보를 압박해 유예 공약을 얻어낼 개연성이 크다. 물론 법에 명기하고 시행령으로 창구단일화 방안 등 세부제도를 설계해 놓으면 정치 일정에 영향을 받지 않고 시행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5년 6개월째 유예되는 제도에 대한 인식이라면 순진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다.
둘째,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유예기간은 6개월이고 복수노조 허용 유예기간이 2년 6개월로 짝짝이 유예기간을 갖게 됐다는 점이다. 결국 6개월과 2년 6개월의 수치는 노사정 간의 주고받기식 정치타협이 낳은 산물이자 무원칙 노사관계의 증거이다. 복수노조 금지나 전임자 임금지급은 공히 글로벌 기준과 관행에 어긋난다.
임 장관이 집권 여당의 정책위의장 출신으로서 법과 원칙만을 고수하기에는 정치적으로 고려할 바도 많았으리라고 짐작된다. 복수노조 및 전임자 제도 개선과 같은 노사관계 개혁과제가 세종시, 4대강 살리기, 공공부문 개혁에 후순위로 밀린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임 장관이 장관 자리를 팽개칠 각오로 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타임오프 범위 조기 설계해야
이제 와서 노사정 합의를 번복할 수는 없는 만큼 후속 매듭이라도 제대로 해야 한다. 전임자 6개월, 복수노조 2년 6개월의 유예기간이 진정한 준비기간이 되려면 타임오프제(근로시간 면제제도) 범위와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가 국익에 맞게 조기에 설계돼야 한다. 노사가 또 견강부회(牽强附會)식 주장을 되풀이하다가 막판에 정부를 탓하며 유예를 주장하는 구태가 반복돼서는 곤란하다. 과거 3년을 돌이켜보면 2년 6개월은 짧은 기간이다. 이 기간에 복수노조 허용으로 인한 현장의 부작용이 없도록 정부가 만전을 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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