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로동공제회에서 경영하는 공제(共濟)라 하는 잡지는 뎨삼호부터 뎨륙호까지 련속 사호를 내리 원고를 압수하얏스므로 동회 경영자 모 씨는 말하되 당국에서 압수함에는 엇더한 이유든지 잇슬터이나 하여간 련속 사호를 압수하야서는 참으로 경영상 곤난이 있다고 개탄하더라.”― 동아일보 1921년 2월 23일자》 “총독정치 반대 안된다” 본보 4차례 정간·폐간 한민족의 입 틀어막아
민족의 목소리를 표현하려는 신문과 잡지, 이에 대응한 총독부의 압수와 기사 삭제, 정간 조치는 일제강점기 내내 이어진 음울한 언론계 풍경이었다. 강압 통치에 맞서 정론을 펼쳐보려는 매체들은 너나없이 발행에 단속(斷續)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기사 삭제와 압수는 일상 다반사였다. 1920년 6월 26일 동아일보에는 천도교계가 창간한 월간지 ‘개벽’이 창간호 발행 즉시 압수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경무당국의 기휘(忌諱·금령)에 것치는 문구가 잇서서 압수를 당하얏는데 저촉된 부분을 삭제하고 호외로 발행한다더라”고 전했다. 이어 1921년에만 역사 세계문제를 다룬 시사종합지 ‘서광’과 ‘여자시론’ ‘서울’ 등의 잡지가 필화사건으로 압수나 발매배포 중지 등의 수난을 당했다는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다.
동아일보는 창간(1920년 4월 1일)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20년 9월 26일 첫 무기정간 조치를 당했다. 전날 실린 사설 ‘제사(祭祀) 문제를 재론(再論)하노라’가 원인이었다. 기독교계와 유교계가 제사와 우상숭배 문제를 놓고 대립한 데 대해 사설은 ‘제사와 우상숭배를 구별하면서 선조를 기념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르며 일인들이 숭상하는 신기(神器·칼, 옥구슬, 거울)야말로 우상숭배’라고 논했다.
조선총독부는 곧바로 25일자 신문을 발매금지하고 26일부터 발행을 정지시켰다. 일왕을 상징하는 신기를 모욕했다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실제 이유는 창간 이후 끊임없는 항일 보도였다. 조선총독부의 발행정지 이유서는 ‘동아일보는 창간 후 수차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고 8월에는 발행인을 소환해 최후 경고를 했는데도 총독 정치를 부정하는 노력을 계속했다’고 적시했다. 이를 시작으로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4차례 무기정간(총 1년 6개월여)을 당했다.
조선일보도 4차례 무기정간(총 8개월)을 당했으며 중외일보도 42일간 무기정간을 겪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이 불거지면서 비슷한 방식으로 일장기를 지운 사실이 알려져 동아일보와 달리 자진 휴간한 뒤 내분과 재정악화로 복간하지 못하고 자진 폐간했다.
일제가 ‘문화통치’를 표방했던 1920년대에도 폐간의 비운을 맞은 매체는 많았다. 사회주의 색채가 강했던 잡지 ‘신생활’은 러시아혁명 기념 특집을 다뤘다가 1928년 1월 23일 폐간 당했다. ‘개벽’도 발매금지 34회, 정간 1회의 탄압 끝에 1926년 8월 1일 폐간됐다.
마침내 일제가 전쟁물자 부족을 구실로 1940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강제 폐간함에 따라 한반도는 광복이 될 때까지 민족의 목소리를 전할 신문이 없는 암흑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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