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업의 부진의 반비례로 광산업만은 왕성하다. 10월 말 현재 광무과 조사 결과 광구는 2362개로 전년 말보다 89광구가 증가했다. 이 가운데 금은광은 739개다…2362개의 광구 가운데 현재 채굴 중에 잇는 광구는 455개로 총 광구 수에 4분지 1에 불과하니 광업가가 갈망하는 황금광시대의 실현은 아직도 어려운 모양이다.”
―동아일보 1931년 12월 1일자》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반, 이 땅에 ‘황금광 시대’가 찾아왔다. 일제의 금 채굴 장려 정책과 금값 폭등으로 너도나도 금맥 찾기에 나선 것이다. 20대 초반에 평북 구성에서 금광을 발견한 뒤 수십 개의 금광을 소유해 갑부가 된 최창학(1891∼1959)의 성공은 서민들의 금 찾기 열풍을 부채질했다.
1931년 12월 11일 동아일보에는 당시 광산업과 관련된 통계가 실렸다.
“광산 로동자의 수효는 소화 5년(1930년) 말 현재 3만5814인인데 그 9할 5분인 3만4178인이 조선인이오, 일본인은 522인, 중국인은 1114인이다. 임금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일급 65전 정도, 일본인은 그 2배가량이다”, “광산 사고는 작년 중에 2832회로 죽은 사람이 76명, 중상자가 479명, 경상자가 2497명으로 도합 3052명의 사상자가 났다.”
낮은 임금을 받고 온갖 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갱도에서 일한 것은 조선의 서민들이지만 그 과실을 따가는 것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지난해 금의 산액이 증가하야 832만2980원에 달했다. 이는 전년보다 60만 원 늘은 수치다…전체 광산의 산액 가운데 조선인은 6분, 서양인은 1할 2분, 일본인은 8할 2분이다…주객전도라니 이런 것을 보고 하는 것이리라.”
황금의 인기가 치솟자 사기와 소송 사건도 잇따랐다. 한 전과자가 ‘황금을 제조할 수 있는 약’이 있다며 각지의 큰 자산가들로부터 십수만 원을 뜯어간 사기사건도 있었고, 광업권의 지분을 둘러싼 고액의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
황금으로 시작된 광산 열기는 일본의 군수물자였던 납을 캐기 위한 열풍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이 같은 열풍을 두고 당시 언론들은 “황금시대를 뒤로 하고 ‘백금시대’가 전개되려고 한다”고 보도했다. 원자번호 78인 백금(Platinum)이 아니라 가치가 금 못지않게 값이 올라가던 납을 ‘흰 금(金)’에 비유한 것이다. “근래 시국이 불안함에 따라 잠수함과 총알에 다량의 연(鉛)이 쓰이는데 일본에는 불과 2개소의 연광이 있을 뿐이다…조선의 연광업은 금광업 이상의 ‘백금시대’를 열 것으로 보인다”(동아일보 1933년 2월 14일)
2008년 초만 해도 13만 원대였던 순금 1돈쭝(3.75g)의 가격은 최근 18만 원까지 올랐다. 세계 경제 전망이 불확실한 가운데 안전한 투자처로 금이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돌잔치 때면 으레 선물하던 금반지는 현금이나 아기 옷, 은수저 등으로 변했고, 거래량이 줄어든 금은방들은 울상을 짓고 있다. 금이 귀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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