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기운이 옷깃을 파고드는 초겨울 해 질 무렵, 잿빛으로 어두워진 서쪽 하늘에 V자로 대열을 지으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발견합니다. 그들이 V자 형태로 비행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때 앞에서 선도하는 기러기의 날갯짓 뒤로는 힘찬 상승기류가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뒤따르는 기러기는 그 기류에 힘입어 더 높고 멀리 날아갈 에너지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올해의 마지막에 이른 순간, 앞에서 선도하던 기러기를 놓친 것처럼 가슴 한가운데를 허전하게 관통하는 상실감을 발견합니다. 비틀거리고 분별없었던 삶의 여정이 용기를 잃어갈 때마다, 우리를 기꺼이 곁부축해 일으켜 세워 주셨던 그분들. 평생을 그리워해도 다시 그리울 그분들을 떠나보내면서 우리들의 삶의 궤적도 흔적 없이 흘러가 버렸다는 공허감을 느끼게 됩니다. 2월에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 5월에 타계해버린 장영희 교수가 바로 그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난해한 논리로 전달하려 하지 않고 일상적인 실천을 통해 품위 있게 살다가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방법을 감동적인 모습으로 가르쳐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씀에는 죽음의 두려움을 훌쩍 뛰어넘는 온후한 사랑과 기품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혼자 받은 것으로만 생각했던 추기경님의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했던 신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선종하신 뒤에야 추기경님의 편지를 받지 않은 신자가 거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가진 배려의 용적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너무나 잘 나타낸 일화입니다. 그 배려에는 사회적 약자라면 누구에게든 한 그릇의 따뜻한 밥이 되고자 하였던 그분의 종교적 신념이 정교하게 배어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천형과 같은 삶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오히려 천혜의 삶을 누렸다고 말하는 장 교수의 말씀도 또한 기억합니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넘어질 때마다 나는 번번이 죽을힘을 다해 다시 일어났고, 넘어지는 순간에도 다시 일어설 힘을 모으고 있었다”는 가슴 에이는 장 교수의 이 한마디 말에는, 평범한 우리도 내 이웃을 변화시킬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향유할 수 있는 선물은 없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런 말씀은 자신의 사형이 집행되기 전 마지막으로 받아든 식사를 거리의 노숙인에게 나눠주라는 어느 흉악범의 감동적인 유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힘과 전파력을 갖게 합니다. 두 분이 남긴 큰 발자취는 삶의 고결한 의미를 수월하게 추스르고 간추리도록 해주었으므로 올해 우리가 거둔 것 중에 가장 숙연하고 값진 수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루하거나 진부하기까지 한 일상에서 거두는 자그만 행복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터득하게 하였습니다. 더불어 지나친 기대와 소망으로 쉽게 좌절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게 해주는 혜안을 갖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마라,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는 고통이 너무 크다”로 요약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짤막한 유언도 그래서 우리들 가슴을 칩니다. 해 저무는 한 해, 서녘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힘찬 원무를 바라보면서, 그분들은 내년에도 다시 우리들의 영혼과 함께한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올해도 행복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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