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65>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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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29일 03시 00분


청산리대첩 승리 이끈
구척장신 ‘만주의 장사’
日, 일대기기사도 가위질

피살 소식이 알려진 뒤 동아일보 2월 14일자에 실린 김좌진의 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피살 소식이 알려진 뒤 동아일보 2월 14일자에 실린 김좌진의 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그이는(김좌진을 가르치는 말) 몸이 뚱뚱하면서도 후리후리한 키가 구척 장신인 거인인 만큼 힘도 큰 장사이엇습니다. 녯날 우리 집에 ‘놋두멍’은 얼마나 무거웟든지 빈 것이라도 칠팔명 장정이 들어야 땅김이라도 하는 것을 그이는 혼자서 힘드리지 안코 물이 반독이나 들어잇는 것을 능큼능큼 들군 하앗습니다. 그러키 때문에 먹는 것도 대음(大飮) 대식(大食)이엇습니다. 술도 그랫거니와 밥 한 두 그릇은 맛이나 보고 고기 근이란 량에 차지도 아니하얏답니다.”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자》
1920년 10월 21∼26일 중국 길림성 화룡면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단 병력 3000여 명은 일본 정예군 동지군 5000여 명과 전투를 벌여 3000여 명의 일본군 사상자를 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승리인 ‘청산리대첩’이었다. 당시 이 전투는 국내에도 알려졌으나 동아일보는 일본 왕실의 3종 신기를 비하하는 사설을 썼다는 이유로 무기정간을 당했을 때여서 소식을 싣지 못했다.

청산리대첩 이후 김좌진의 이름은 국내에서 ‘만주의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졌고 그의 동정은 큰 관심거리였다.

김좌진은 1921년 3월 만주 지역 독립군들이 조직을 재정비해 ‘대한국총합부’를 만들어 ‘군무부장’을 맡았고 1925년엔 군사조직인 신민부를 창설했다. 동아일보는 1928년 3월 3일자에서 김좌진의 신민부가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고 다시 활동을 개시해 밀산현에서 암중 비약(飛躍)하고 있다는 내용을 전했다.

충남 홍성의 명문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15세 때는 집안의 노복 50여 호에 노비 문서를 내주어 풀어줬다. 19세에는 자신의 99칸 집에 학교를 세워 향리의 청소년을 양성했다. 서울로 올라온 뒤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수감 생활을 했는데 그를 체포하기 위해 탑골공원에서 경찰 7, 8명이 둘러쌌으나 김좌진이 포위를 뚫고 키보다 높은 공원 뒷문을 뛰어 넘어 달아났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그는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됐다. 이 소식은 국내에 늦게 알려져 동아일보에선 2월 9일에야 피살설이 보도됐고 2월 13일 만주 한인들이 그의 부고를 공식적으로 낸 뒤에야 확인됐다.

동아일보는 당시 “이십여년 동안이나 남북만주로 도라다니며 혹은 ○○군을 양성하기 위햐야 다수한 조선청년을 모아 실제 훈련을 하고 혹은 이천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북간도 방면에 넘나들며 혹은 신민부를 조직하야 십년을 활동하야…(중략) 조선사람에게 ‘조선이 가진 만주의 장사’라는 늣김을 주엇다”고 회고했다.

동아일보는 그의 죽음을 기려 2월 14∼18일 4회에 걸쳐 김좌진의 일대기를 소개했다. 특히 마지막 4회는 민감한 내용이 담겼다는 이유로 기사의 절반이 삭제된 채 발행됐다.

광복 후 1949년 김좌진 추모비가 출생지인 홍성에 세워졌고 1999년엔 기념사업회가 설립됐다. 그의 아들인 김두한은 종로의 주먹세계에서 이름을 날리다가 3, 6대 국회의원을 했고 손녀인 김을동 씨도 18대 국회의원이 됐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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