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인철]자서전 선거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7일 03시 00분


한 고위급 교육공무원은 최근 자서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달라는 교육계 인사들의 초청장 4장을 받아놓고 고민에 빠졌다. 서울시교육감 선거 출마를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진 교원단체 회장을 비롯해 서울시교육위원 2명, 현직 고교 교장이 홍보 차원에서 준비하는 행사다. 서로 뻔히 아는 처지에 누구 행사에는 가고, 누구 행사에는 빠질 수 없다. 한쪽에만 가면 ‘누구는 누구편인 것 같다’는 소문이 금세 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예 안 가자니 혹시 당선되면 어쩌나 하고 은근히 걱정이 들고, 다 쫓아다니자니 비용도 만만치 않다.

자서전 출판 바람은 교육계만의 현상은 아니다. 6월 2일 실시되는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는 현직 지방자치단체장이나 다른 후보들은 더 경쟁적으로 책을 내고 있다. 재선을 표명한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해 9월 자신의 서민정책인 장기전세주택을 뜻하는 ‘시프트(Shift): 생각의 프레임을 전환하라’는 책을 내고 자신의 인생역정과 경영 노하우를 소개했다. 이에 맞서 출마를 선언한 송영길 민주당 의원은 ‘벽을 문으로’라는 책으로 맞불을 놨다. 서울 시내 25개 구청 중 10명의 구청장이 자서전이나 칼럼집 등을 내놓았다. 지방도 마찬가지다. 대전시장 출마가 유력한 염홍철 전 대전시장이 지난해 11월 23일 시집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자 1주일 만에 박성효 현 대전시장이 ‘무지개프로젝트’란 책으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양측은 출판기념회 참석자 수를 보도한 지역언론사에 “우리 인원은 축소되고, 상대방의 인원은 과대포장됐다”고 항의하며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3선을 노리는 안상수 인천시장에 맞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려는 지역인사 5명도 뒤질세라 자서전이나 수필집을 냈다. 광주의 3개 구청장도 책을 줄줄이 냈다.

이 같은 출판 러시는 현직 단체장은 선거 60일 전까지 공직에서 물러나야 하고, 90일 전까지만 출판기념회를 열 수 있다는 현행 공직선거법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현직 단체장에게는 현직 타이틀을 갖고 수백 명씩 모아놓고 자신을 홍보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수 없다. 시한인 2월까지 출판기념회는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저자’들은 정관계·학계의 저명인사들을 들먹이며 자신이 힘 있는 사람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은근히 과시하고 싶어 한다. 지역구의 대학총장, 국회의원, 시장 등 거물들에게 자서전 추천사를 써달라고 하거나 행사에 참석해 ‘한 말씀’ 해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책들은 얼마나 팔릴까. 주요 서점이나 인터넷 판매 사이트를 보면 판매 실적이 거의 없어 ‘뿌리기용’임을 알 수 있다. 책을 내는 목적이 판매보다는 자기자랑을 위한 것이고, 내용도 어린시절의 추억, 공직 입문 배경, 당선과정, 재임 치적 등 천편일률적이어서 별 관심을 끌지 못한다. 직접 집필하기보다는 대필 작가를 고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000권 출간에 1000만 원 정도 들지만 저자가 자비로 책을 사주기 때문에 출판사는 판매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어지간히 공부한 사람도 책을 내려면 남이 어떻게 평가할까 망설여지고 두렵다고 한다. 아무리 ‘자기 홍보시대’라지만 최근의 자서전 열풍을 보면 심오한 깊이나 진정성보다는 표를 의식한 정치적 속셈으로만 읽히니 좀 허탈한 느낌이다.

이인철 사회부장 in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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