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두 가지 방법으로 살 수 있다. 기적 같은 건 없다고 믿으며 사는 법, 그리고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법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적용하자면 지난해 서울에서 작품전을 연 유리조형 작가 데일 치훌리 씨(69)는 후자에 속한다. ‘유리공예’의 실용성을 넘어 ‘예술’로 격상시킨 그의 작품도 독보적이지만 절망 앞에서 담담히 현실을 수용해온 삶의 자세는 더 인상적이다.
인생길 막다른 골목의 기적
1972년 그의 스튜디오는 불로 타버렸다. 1976년 차 사고로 얼굴을 256바늘 꿰매는 수술을 했다. 이때 왼쪽 눈을 실명한 뒤로 애꾸눈 선장 같은 검은 안대를 하고 다닌다. 1979년 어깨가 탈골되는 사고로 유리작업을 할 수 없다는 선고를 받는다. 여기서 주저앉는 게 보통인데 그는 달랐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작업하는 팀을 이끄는 방식으로 재기해 세계적 명성을 얻기에 이른다.
몸은 제약 속에 살아도 정신은 작품을 통해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기쁨을 발견한 것이다. 분노와 좌절이 아닌 유머와 도전정신으로 자기 앞의 생을 응시한 작가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을 생애 중 가장 빛나는 시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연금술을 발휘했다. 놓아버릴 것은 놓아버리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것이리라. 그는 희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폴란드의 노벨상 수상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시가 말하듯, 우리는 ‘불행을 요리하는 방법,/나쁜 소식을 견뎌내는 방법,/불의를 최소화하는 방법,/신의 부재를 극복하는 방법’을 언제쯤 깨우칠 수 있을까.
그 작은 단서를 최근 뉴욕 시 교통국이 시도한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보여준다. 대중교통 승차카드 뒷면에 ‘Optimism(낙관론, 낙관주의)’ 한 단어를 인쇄한 것이 전부다. 안전수칙 등을 넣던 자리에 그래픽 아티스트가 디자인한 이 로고가 들어가면서 시민의 일상용품이 개념미술의 캔버스로 변했다.
세계 경제위기의 주 무대로 전락한 뉴욕에서 지하철과 버스 승객의 승차권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 된 것이다. 이제 걸음마를 뗀 한국에서의 공공미술이 종종 그러하듯 “날 좀 보소” 하며 과장되게 떠벌린 작업도 아니다. 미리 홍보하지도 않고 조용히 1400만 장의 표에 밝은 기운을 담아 퍼뜨리고 있다. 삶의 내리막길에 선 누군가가 이 ‘우연한 발견’에서 긍정의 힘을 떠올리면 그걸로 족하다는 취지다. 도시의 안목과 정신적 저력이 느껴진다.
또 새해다. 쭉 뻗은 길이 펼쳐질지, 가파른 오르막일지는 선택의 여지가 적다 해도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처할지는 선택 가능할 일이다. 내가 지금 ‘어떤 꼴’이든 속 끓이지 말고 묵묵히 한걸음씩 걸어가는 것. 이것이 희망을 향한 출구에 시나브로 다가가는 길 아니겠는가.
새해엔 묵묵히 한걸음씩
진부한 것 같지만 실천은 어렵다. 고백하건대 나부터가 그렇다. 칼럼 초고라고 써놓고 어딘지 익숙하다 싶어 머릿속을 헤집으니 예전에 소개한 내용이다. 부러 동일 소재의 ‘반복’을 키워드로 삼은 대작가 앤디 워홀도 아니고 오죽 밑천이 달리면 무의식중에 ‘자기 복제’를 한 것일까. 급히 다시 쓰는데 이번엔 실수로 원고가 날아갔다. 세상사 어느 하나, 낙관적 에너지로 대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도!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굽은 길은 굽게 가고/곧은 길은 곧게 가고/막판에는 나를 싣고/가기로 되어있는 차가/제 시간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두어 시간/땀 흘리며 걷기도 했다/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걷지 않아도 좋은 길을 걸었으므로/만나지 못했을 뻔했던 싱그러운/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빨갛게 익은 멍석 딸기도 만나고/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물총새, 쪽빛 날갯짓도 보았으므로’(나태주의 ‘사는 일’)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