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세종시, 싸우다 쪽박 깨면 民이 피해자 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12일 03시 00분


정운찬 국무총리가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한 11일 충남 연기군 일대에는 원안 고수를 주장하는 플래카드가 어지럽게 나붙어 있었다. 어제 현지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 서울 광화문에서 승용차를 타고 출발해 세종시 예정지에 도착한 것은 3시간 뒤인 오후 2시 20분이었다. 원안대로 행정부처들이 세종시에 옮겨갈 경우 장차관과 공무원들이 서울을 오가며 초래될 비효율이 걱정됐다.

이날 오후 6시 반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조치원역 광장에서는 ‘행정도시 수정안 전면 거부 및 원안 사수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서 유행했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로 집회가 시작됐다. 참석자들은 ‘500만 충청도민 똘똘 뭉쳐 행정수도 사수하자’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심판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충청권 알기를 장기판 졸로 안다’는 지역감정 자극 발언도 나왔다. 그러나 참석자는 200명 정도로 많지 않았다.

집회장 주변에서 만난 한 주민은 “기업들이 들어오면 일자리 창출과 지역발전을 위해 더 낫다는 민심이 저류에 있지만 공개적으로 표출하기 어렵다”고 분위기를 설명했다. 충남 대전 지역에서 수정안 발표를 계기로 여론의 변화 가능성도 엿보인다. 충남도는 수정안에 대해 “인구 유입 촉진과 지역주민 일자리 창출로 연결돼 지역경제 활성화 및 국가균형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란 반응을 보였다. 대전 지역의 수정 반대론자였던 한 교수는 “수정안 자체는 좋다. 지역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면서도 “문제는 신뢰”라고 말했다. 연기군의 한 식당 주인은 “기업들이 들어오는 것이 일자리나 개인 사업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며 “지역의 밑바닥 정서나 식당 손님들의 말을 들어보면 정치인들 주장과는 다른 것 같다”고 바닥 민심을 전했다.

첨단 과학교육도시는 새로운 기회

정부가 어제 내놓은 세종시 수정안은 행정부의 9부 2처 2청 이전이 중심이었던 원안 대신 세종시를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로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계획을 담고 있다. 삼성 한화 롯데 웅진 등 대기업들을 참여시키고 고려대 KAIST 등 대학을 유치해 세종시를 국가의 미래 신(新)성장 동력의 메카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특히 대체에너지, 바이오 등 미래성장엔진이 될 수 있는 산업과 함께 교육-연구-기술-창업-글로벌기업 연계가 모두 가능하도록 설계한 미래형 첨단도시다.

유럽연합(EU)은 앞으로 10년간 유럽을 가장 경쟁력 있는 지역으로 만들기 위한 ‘2020 전략’ 회의를 다음 달 연다. 유럽은 10년 전에도 “2010년까지 가장 경쟁력 있는 유럽을 만들자”며 ‘리스본 전략’을 만들었다가 실패한 전력이 있다. EU는 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녹색산업과 고등교육에 초점을 맞춘 테크놀로지를 강조했다. 이 같은 세계적 흐름을 감안한다면 첨단 과학교육도시 세종시 건설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라고 볼 수 있다.

야당들은 원안과 수정안의 접점(接點)을 찾으려는 노력은 해보지도 않고 결사반대 투쟁에 나서고 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이 정권은 세종시 백지화를 필두로 혁신도시와 기업도시도 무력화하는 것에 착수하고 있으므로 좌시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자유선진당은 “세종시 원안 수정은 역사상 최악의 정책실패로 기록될 것”이라며 정 총리 해임건의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선진당은 삭발식까지 하며 결의를 다졌다.

부끄러운 ‘반대의 역사’ 언제까지 거듭할 건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역사는 국책사업에 대한 정치적 반대를 극복했기에 가능했다. 야당이 반대한 중요 국책사업은 1968년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과 올해 개통 40주년을 맞이하는 경부고속도로가 대표적인 경우다. 지난해 말 한국은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자력발전소를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19년 동안 주민의 격렬한 반대로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성폐기물을 처리하는 시설의 용지를 찾지 못하고 떠돌았다. 국책 사업에 대한 반대투쟁은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거나 정략적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야당은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건설 때와 같은 부끄러운 반대투쟁의 역사를 하나 더 보태지 말고 전체 국익을 위한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세종시 수정 논란과 관련해 “수없이 토의했고 선거 때마다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한 사안”이라며 “정치는 신뢰”라는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정 총리는 어제 “세종시 건설은 정치적 신의(信義) 문제 이전에 막중한 국가 대사”라면서 “이를 결정하는 기준은 어느 방안이 국민과 국가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당이나 정치인이 국가 장래를 멀리 내다보지 않고 특정 지역의 표만을 의식해 포퓰리즘적 미봉책에 영합한다면 국정을 책임질 자격이 없다고 우리는 본다. 야당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일부 의원들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세종시 난제를 풀어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와 정치의 수준을 가늠할 기회가 될 것이다. 미국 의회가 건강보험 법안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통해 합의안을 마련해 표결처리한 데서 우리 의회는 배울 바가 많다. 우리는 세종시 문제가 대의민주주의 틀 안에서 정상적인 대화와 토론 과정을 거쳐 합리적 결론에 이르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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