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라파의 풍운은 드디어 도처에서 불똥이 튀기 시작하엿다. 영국과 불란서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로 주식시장은 노한 불길과 같이 대전경기(大戰景氣)를 구사하고 있다. 동신(東新)은 독일과 포렌드가 충돌하면서 오늘까지 삼십오원이나 오른 셈이고…중매점도 대만원이오 주식판은 뜻 아니한 기쁨에 잠겻다.”
―동아일보 1939년 9월 5일자》 20세기 초 근대 문물의 유입과 함께 산업이 발전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자본시장도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국내 첫 주식거래시장은 1920년 문을 연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이었다. 1920년 8월 15일 동아일보는 “경제계의 주목을 크게 끌었던 경성주식현물취인시댱은 마침내 작십사일상오십시부터 명치뎡에 새로 지은 이층 양관에서 성대한 개업식을 개시하얏다”고 소개했다. 당시 ‘명치뎡’은 지금의 명동으로 금융의 중심지였다.
개업식 당시 조선취인소의 주식 매매 풍경은 “시쟝 북편 복도에는 칠팔개의 뎐화를 거러놋코 주식의 시세가 결뎡되는 때마다 다각기 사무소로 기별하는 양 바로 뎐화통에 불이 이러날 듯 하얏스며…”로 묘사됐다. 1932년에는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과 인천미두취인소를 합병한 조선취인소가 개설됐다.
광복 전까지 운영된 조선취인소에서 가장 큰 부를 쌓은 조선인은 조준호였다. 1938년 9월 27일 동아일보에는 ‘실업계 투사 조준호 씨’라는 제목으로 그의 활약상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렸다. 구한말 갑부 조중정의 아들이었던 그는 동아증권을 설립하고 주식계의 큰손으로 활약했다. 한국증권업협회가 발간한 ‘이야기로 보는 한국 자본시장’에 따르면 조선취인소 전체 매매액의 10% 이상이 동아증권을 통해 이뤄졌고 조준호는 당시 돈 300만 원 이상을 벌어들였다. 오늘날 3000억 원이 넘는 거액이다. 하지만 정보력과 자금력에서 취약한 상태로 섣불리 주식에 투자했던 수많은 조선인들은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일본 은행의 국내 진출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활발해졌다. 이에 맞서 19세기 후반에는 정부와 민족 자본가들이 설립한 국내 은행들이 등장했다. 1897년에 한성은행이, 1899년 대한천일은행이 설립됐고 1920년에는 해동은행이 설립됐다. 정부가 1906년 농업과 공업의 발달을 위해 세운 농공은행은 오늘날의 산업은행으로 이어졌다.
안정된 고용과 꽤 높은 보수를 보장한 은행원이 인기 직업으로 떠오르면서 은행원의 일과와 은행원 되는 법을 소개한 기사도 이어졌다. 1925년 3월 6일 동아일보에는 당시 여행원의 하루가 소개됐다. “녀자는 은행 발행과에서 아츰 아홉시부터 저녁 네 시가 지나도록 각 지Z에서 모혀드러오는 산갓치 싸이는 지폐를 일일히 조사하야 번호수를 맛치며 위조지폐를 조사하는 것 등으로 여러 가지를 장부에 긔록하고 최후에는 소각하는 데로 넘김니다.”
오늘날 국내 자본시장은 이제 복잡한 금융상품이 넘쳐나는 거대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초 국내에서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되면서 국내 금융산업은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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