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청와대로부터 사회통합위원회(사통위) 위원장 제의를 받고 고심을 거듭하던 고건 전 국무총리는 그해 12월 초 자신이 생각하는 사통위 운영의 기본전제를 A4용지 한 장에 정리했다. 그러고는 이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얼마 뒤 청와대에서 그 기본전제에 공감한다는 답이 왔고 고 전 총리도 석 달째 고사했던 위원장직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통위 민간위원에 ‘뉴라이트’와 ‘뉴레프트’를 각각 대표하는 박효종 서울대 교수와 임혁백 고려대 교수가 나란히 참여하게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지난해 12월 21일 위원장 임명 발표 후 한 달 만인 이달 20일 서울 종로구 창성동 정부중앙청사 별관 5층 위원장실에서 동아일보 기자와 만난 고 위원장은 “벼슬이었다면 끝까지 고사했을 것”이라고 했다. “비상임이고 무보수다. 사회봉사의 연장선에서 나의 갈등관리 경험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취임 후 처음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한 고 위원장은 “사통위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면서 “사회갈등 요인에 대한 현실적인 정책 대안을 모색할 것이다. 우리에게 거대 담론은 필요 없다. 실천적 정책담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통위가 최근 10대 핵심과제 중 하나로 내놓은 북한 녹화 프로젝트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훗날 통일이 됐을 때 우리가 안게 될 가장 큰 문제는 헐벗은 산림이다. 단편적으로 양묘장을 지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조림 시비(施肥) 병충해방제 연료대체 주민소득을 포괄하는 계획으로 추진하자는 것이다.”
―북한 나무심기로 사회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냥 탁상에서 나온 게 아니다. (이념분과위원인) 라종일 우석대 총장과 문정인 연세대 교수, 소장 학자 등과 함께 보수와 진보가 공동으로 추진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였다. 많은 국민이 사회통합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참여할 수 있는 게 뭐냐, 그게 나무심기라고 한 것이다. 북한 나무심기에 많은 국민이 참여한다면 그거야말로 사회통합운동이 될 것 아닌가.”
―북핵 문제의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또 다른 형태의 퍼주기로 그칠 개연성도 있지 않을까.
“보수와 진보가 협의해서 하자는 것이다. 어차피 정부도 이 계획을 갖고 있으니까. 1단계는 민간 베이스다. 그게 잘되고 남북대화가 잘되면 2단계인 정부 간 사업으로 간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탄소배출권 확보를 위해 어딘가에서 조림을 해야 할 형편이다. 그걸 남미에 가서 하기보다 북에 가서 하는 게 낫지 않은가.”
―용산 참사 같은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는데….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소하고 해결하는 절차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그게 없어서 화염병과 특공대의 극한 대결로 간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안이 있나.
“1989년 서울시장 때 100여 곳에서 달동네 재개발사업이 한창이었다. 세입자들이 자살하고 화염병이 난무하고…. 도시빈민의 참상을 우회적으로 그린 조세희의 소설 ‘난쏘공(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다시 회자될 때였다. 그때 재개발 이익을 세입자에게도 약간은 배분해 주라는 차원에서 재개발 임대주택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그때는 달동네 재개발이지만 지금은 도심 재개발, 즉 빌딩 재개발이다. 세입자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 권리금에 대한 보상을 어느 정도 해줄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다. 새로 생기는 상가에 대한 우선입주권을 준다든지 하는 여러 방법을 검토할 수 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로 사회갈등이 극에 달했던 게 사통위 출범의 한 배경이었다. 당시 무슨 생각을 했나.
“성숙한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고 의회민주주의기 때문에 촛불집회나 민중시위적 성격의 ‘운동의 정치’는 절제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왜 소통이 될 수 없었을까 하는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큰 갈등 이슈는 세종시 문제인데….
“세종시 문제는 정치권이 만든 정치적 갈등이다. 원래 정치적 갈등뿐만 아니라 사회갈등도 정치권이 흡수하고 조정해야 한다. 그런데 정치권 스스로가 내부에서 갈등을 생산해 내기 때문에 다른 사회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사통위가 출범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갈등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사회적 갈등은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자기 갈등은 자기가 관리하는 게 기초적인 임무다. 그걸 못하니까 헌법재판소까지 가는 것 아닌가. 정치권 내 정치적 갈등을 어느 위원회가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건 연목구어다.”
―수도 분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개인 견해는 갖고 있지만 사통위원장으로선 얘기하면 안 된다. 사통위는 여야나 보혁이나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면 신뢰를 못 받는다.”
―모든 갈등 사안이 시의성이 있는 것 아닌가. 나중에 얘기해 봐야….
“사통위는 현실 사안을 재판하는 기능은 없다. 불을 끄는 것은 소방수인 정부가 하는 것이고 우리는 불이 안 나려면 불연자재를 써야 한다든지, 소방차를 현대식으로 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을 건의하는 것이다. 다만 사후에라도 외양간 고치는 얘기를 권고한다는 것이다. 정부 정책이 사후 영향평가를 받으면 가급적 갈등 예방적으로 가지 않겠느냐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사통위원장 임명 후 사회 원로들을 만났다고 들었다.
“새해 초 뵈었던 정진석 추기경님의 말씀에 놀랐다. ‘사람의 의견이 다 다르고 똑같을 수 없다. 그러나 공통점은 있다. 공통점을 찾아서 서로 공감하는 걸 추진하면 큰 물줄기가 잡히고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거야말로 바로 사통위의 실천적 방법론이 아닐까 한다.”
―정치를 다시 한번 할 생각은 없나.
“생각해 본 일 없다.”
―대통령 말고는 다 해봤는데 미련이 있을 것 같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으며) ….”
고 위원장은 요즘 건배 구호로 ‘사통팔달(四通八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외친다. 특히 사통팔달은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상하좌우 네 방향으로 의사소통이 잘되고 소통 결과가 전국에 도달한다는 의미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인근 추어탕집으로 이동하면서 고 위원장은 자신이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 ‘시중(時中·중용에 나오는 말로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균형을 잡는다는 뜻)’을 강조했다. 한때 대선후보로 거론되던 시절 ‘창조적 실용주의’를 주창한 바 있는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친서민 중도실용을 정책 기조로 내세운 것은 잘했다고 본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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