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사건이었다고 치자. 너무나 엄청난 폭력이어서 목격자들이 들고 일어나고 도시가 마비됐을 정도다. 잘잘못을 따지는 재판이 열렸다. 폭력은 엄연한 사실이었으므로 공방의 초점은 당연히 폭력이 고의였는지 아닌지였다. 그런데 재판장이 말했다. “폭력은 없었다.” “땅땅땅.”
▷광우병 관련 MBC PD수첩의 고의적 왜곡을 처음 폭로했던 정지민 씨는 재판이 끝난 뒤 황당할 뿐이라고 했다. 그는 이 프로그램의 공동번역과 감수를 맡았다. 광우병 방송 두 달 만에 PD수첩이 “일부 의역(意譯)을 해 오해가 생긴 것은 유감”이라고 해명하자 “문제는 번역이 아니라 광우병 위험을 강조하려는 제작진의 의도”라고 정면반박한 사람이 바로 그다. 해명에서 밝혔듯이 왜곡은 PD수첩 측도 인정한 바다. 다만 고의가 아니라 실수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20일 서울중앙지법 문성관 판사가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정 씨는 “허위사실 자체가 없었다는 판결에 제작진이 오히려 당황했을 것 같다”고 했다.
▷‘동기가 있는 추론(motivated reasoning)’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정보를 찾고, 이에 맞지 않는 정보는 외면하며, 사실이 믿음과 어긋날 때는 믿음 아닌 사실을 버린다는 것이다. 정 씨도 “판사가 처음부터 무죄라는 결론을 내려놓고 짜 맞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판사를 고소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이라고도 했다.
▷정 씨는 “역사학도로서 나는 사실관계의 파악 및 재현 그리고 허용 가능한 오차 범위에 대해 항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 오도되고 있을 때,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는 데는 거창한 선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 자존심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가 PD수첩 사건의 전말을 쓴 책 ‘주(柱)’의 부제가 ‘나는 사실을 존중한다’다. “사실관계와 이념이 어긋날 경우가 생긴다면 전자가 존중돼야 한다. 나와 기본적 이념이 많이 다른 사람들도 사실관계를 존중하기를 기대한다.” 정 씨가 서문에서 쓴 이 말과는 달리 이념이 사실을 농락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곧 유학을 떠난다는 그가 좋은 역사학자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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