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82>민족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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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6일 03시 00분


돗자리 짜게 만들어
고등교육 기회 뺏고
조선인만 태형 처벌

1919년경 돗자리 짜기 실습을 하고 있는 보통학교 학생들. 일제는 조선인에게 초등학교 졸업 후 실업에 종사할 것을 권장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19년경 돗자리 짜기 실습을 하고 있는 보통학교 학생들. 일제는 조선인에게 초등학교 졸업 후 실업에 종사할 것을 권장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뎨일 몹시 조선 사람에게 해독을 끼쳐준 것은 조선 사람으로 하야금 어늬 때까지던지 일본 사람보다 어리셕고 나진(낮은) 사람이되 영구히 일본 사람을 윗자리에 세우랴고 하는 차별정책 중의 어버이 차별은 조선의 교육제도이다.”

―동아일보 1920년 5월 27일자》
우리의 근대 역사는 일제가 촘촘하게 쳐 놓은 차별 정책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일제는 조선인을 일본인보다 열등한 존재로 놓고 사회 각 영역에서 차별적 대우를 했다.

차별은 교육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일제는 조선인이 고등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철저히 억제하고 초등교육은 동화(同化)와 실업 기술 교육에 초점을 맞췄다. 1911년 발표한 조선교육령에서 일제는 ‘충량한 국민 육성’과 ‘시세와 민도에 적합한 교육’을 목표로 적시했다.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고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최소한의 교육만 실시하겠다는 정책이었다.

1910년대 조선의 초중등 교육 학제는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 4년이었다. 반면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소학교 6년, 중학교 5년의 교육을 받았다. 조선인에 대한 교육 내용도 일본인 학교와 달리 실업 교육 위주였다. 보통학교 학생들은 밀짚모자, 돗자리, 가마니 만드는 법을 배웠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초등교육을 끝으로 실업에 종사할 것을 권장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대학 설립을 허용하고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을 6년으로 늘렸지만 교육 정책의 근간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1920년대 초 이상재 등 민족지도자들이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펼치자 일제는 경성제국대학 설립으로 이를 견제했다. 일제는 또 ‘1면(面) 1교(校)’ 정책을 시행하면서 각 고장의 정신적 문화적 근간이던 향교를 파괴했다.

형벌에 있어서도 일제의 차별은 노골적이었다. 1912년 발표한 ‘조선 태형(하의를 벗겨 볼기를 노출시키고 때리는 형벌)령’에서 ‘본령은 조선인에 한해 적용한다’고 규정했다.

동아일보는 1920년 5월 14일부터 총 19회에 걸쳐 연재한 ‘무차별인가 대차별인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고위 관료에 조선인을 기용하지 않는 등 총독부의 민족 차별을 고발했다. 5월 21일 8회 기사에서는 죽은 행려병자를 묻을 때 일본인은 관에 넣으면서 조선인은 거적으로 싸서 묻고 있다며 “이것이 차마 사람이 할 차별인가”라고 개탄했다. 기사는 이어 고등보통학교에서 바구니나 만드는 어리석은 교육을 시행한다며 교육 차별을 “차별 즁의 근본!인 대챠별”로 지목했다.

이 같은 식민지배의 억압과 차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인들의 분노로 폭발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은 일본인 학생의 조선인 여학생 희롱이 발단이었지만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됐다. 1931년 동아일보가 ‘브나로드 운동’으로 문맹 퇴치에 나선 것도 일제의 교육 차별에 대한 저항이자 현실적인 대처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면서 이주민 등에 대한 차별 문제가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동등한 기본권의 보장은 식민지 차별의 아픔을 겪었던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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