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권위 있는 민간 경제연구기관인 전미경제연구소(NBER)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진이 있던 지난해 9월 흥미로운 보고서를 내놓았다. ‘불황기 때 성장하기: 신념과 거시경제(Growing up in a recession: Beliefs and the macroeconomy)’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불황이 당시 청년세대(18∼25세)의 의식 형성과 ‘그 이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1972∼2006년 미국의 사회조사자료를 갖고 들여다본 것이다.
1930년대 경제대공황과 1970년대 초 오일쇼크, 가깝게는 2000년대 초 버블 붕괴 시절에 청년기를 맞았던 이들의 고통은 예상보다 오래 지속됐다. 이른바 미국의 ‘R세대(Generation of Recession·불황세대)’는 최소 40세가 될 때까지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게 보고서의 결론이다.
불황세대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자신의 의지보다는 정부의 정책에 기대는 경향이 뚜렷하다. 둘째, 자신의 노력보다는 운(Luck)에 따라 인생이 좌우된다고 본다. 셋째, 정부에 기대면서도 정부에 대한 신뢰가 가장 낮다. 이 보고서는 불황의 심리적 충격이 당시 청년세대의 삶에 오랜 기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한국에서도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첫 불황세대가 탄생했다. 1997∼1998년 대학 졸업을 앞뒀던 ‘IMF 세대’다. 불황은 젊은 세대를 위축시켰을 뿐 아니라 2000년대 한국 경제에 ‘도전정신과 기업가정신의 상실’이라는 먹구름을 드리웠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01년 이전 창업자의 평균 연령은 37.3세였던 데 비해 2001∼2004년엔 43세, 2005년 이후엔 45.2세로 높아졌다. 젊은이들의 공기업 지원은 폭증하고 있지만 스스로 기업을 일으키겠다는 도전은 줄고 있다. 한국 경제의 생명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10년을 맞는 2010년. 한국은 10여 년 만에 또 다른 R세대를 목도하고 있다. 15∼29세의 청년실업률이 2000∼2008년 평균 7.2%에서 2009년 8.1%로 전 연령층에서 가장 많이 상승했다. ‘그냥 논다’는 청년층이 작년 말 현재 147만 명이나 된다.
그래서 21일 처음으로 열린 국가고용전략회의에 거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당국자들이 머리를 쥐어짠 대책들은 아직은 근시안(近視眼)적이다. 나랏돈을 풀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당장은 효과가 날 수 있다. 고용문제의 해결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점도 공감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청년세대에 ‘링거’를 맞히는 기간이 길어서는 곤란하다.
청년들의 도전정신을 살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안철수 KAIST 석좌교수와 이민화 중소기업청 기업호민관 등 벤처 1세대들의 경험에서 우러난 고언(苦言)에 귀를 기울였으면 한다. 한국의 기업가정신과 청년 창업을 가로막는 대표이사 연대보증제도를 개선하고 지식창업과 같은 21세기형 창업제도를 만드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불황세대의 상흔(傷痕)의 골은 넓고 깊다’는 NBER의 연구보고서. 국가고용전략회의 멤버들이 그냥 흘려듣기에는 너무 무거운 얘기다. 사회와 국가,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은 청년 때 만들어져 나이가 들어서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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