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육상장거리의 혜성 양정고보의 손기정 군은 21일 정오 동경에서 열린 일본 마라톤연맹 주최의 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26분 14초란 경이적인 세계 최고기록을 지어 우승하여 명년으로 앞둔 제11회 세계올림픽대회에 우승할 제1 후보로도 엄지손을 꼽게 되어 파견이 확정적이다.”―동아일보 1935년 3월 21일자 호외》
손기정(1912∼2002)이 베를린 올림픽 출전 선수 선발을 겸한 전일본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동아일보는 호외를 발행해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의 태양은 뜨거웠다. 섭씨 30도, 출발선에 선 손기정의 이마에는 벌써 땀이 맺혔다. 오후 3시 3분 출발 총성이 울렸다. 세계 각국 56명의 선수가 한 덩어리가 돼 스타트 라인을 떠났다. 손기정은 56명 중 22번째로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반환점을 돌았을 때 전 대회 우승자인 아르헨티나의 후안 사발라가 1시간11분29초의 기록으로 1위였다. 엄청난 기록 단축에 세계가 술렁였다. 하지만 오버페이스였다. 4위로 달리던 손기정은 차분히 기회를 엿봤다. 30km 지점에서 사발라가 레이스를 포기했다. 손기정이 1위로 나섰다. 그 뒤 골인 지점까지 모든 선수가 그의 등 뒤에 있었다. 세계신기록 2시간29분19초, 우승이었다. 함께 출전한 남승룡(1912∼2001)은 2시간31분42초로 3위.
손기정의 세계 제패 소식은 조선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는 8월 10일 아침 일제히 호외를 발행했다.
동아일보 8월 11일자 사설은 “이제 손, 남 양 용사의 세계적 우승은 시드는 조선의 자는 피를 끓게 하였고 사라진 조선의 맥박을 뛰게 하였다”고 찬사를 보냈다. 11일부터 3일 동안은 ‘손기정이 영웅이 되기까지’ 시리즈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25일자에 손기정의 시상 장면 사진을 게재하면서 일장기를 지워 9개월 동안 정간을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손기정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1932년 3월 경영(서울∼영등포) 단축마라톤에서 2위를 차지하면서부터였다. 양정고보 2학년 때인 1933년에는 조선 신궁대회 마라톤 풀코스에서 우승해 유명인사가 됐다. 이 대회 이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할 때까지 손기정은 국내 마라톤과 중장거리 육상대회 우승을 휩쓸었다.
이후 그는 코치로서 마라톤 발전에 기여했다. 그가 길러낸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은 1950년 미국 보스턴 마라톤에서 1, 2, 3위를 차지했다. 손기정은 1948년 대한체육회 회장, 1963년 대한육상경기연맹 부회장, 1988년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을 지냈고 2002년 11월 별세한 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정확히 56년 뒤인 1992년 8월 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6년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이봉주가 은메달을 차지했다.
한국 마라톤은 현재 주춤한 상태다. 2000년 도쿄 국제마라톤에서 이봉주가 세운 2시간7분20초의 한국 최고기록은 10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그 사이 세계 최고 기록은 2시간3분59초(하일레 게브르셀라시에·에티오피아)까지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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