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119 현지서 명성 높았지만 선진국 구호활동 시스템 부러워 생명 구하는일 더 베푸는 나라돼야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말 복 받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17일 오후 4시 반(현지 시간)부터 동료 25명과 함께 4박 5일 일정으로 아이티에서 구조 활동을 하고 귀국(25일)한 중앙119구조대 홍용기 소방위(40)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고 대단한 것인지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남의 불행을 보면서 행복을 느낀다는 게 미안한 일이지만 생지옥을 보고 돌아온 동료들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 15년 동안 재난 현장을 많이 다녀보았지만 아이티 같은 곳은 처음이라고 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 시테솔레유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마스크 없이는 다닐 수 없었고 널브러진 시신들은 아무렇게나 태워졌다. 포클레인 콘크리트 더미에 실려 나오는 잘린 상·하반신과 찢긴 사지(四肢)들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고깃덩어리처럼 느껴졌다.
2008년 중국 쓰촨 성 지진 때에도 구조 활동을 했었다는 그는 “그때는 시신을 발굴하고 나면 대원들이 모여 경례를 하며 죽은 자의 넋을 위로했다. 하지만 아이티에선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란 게 사치처럼 느껴졌다. 죽어서도 쓰레기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그곳 사람들에겐 영혼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고 전했다. 지구 위 같은 시공간을 사는 삶이 어느 나라에 태어났는지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충격을 받았다.
“부실하고 낡은 집들은 약간의 흔들림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건물이 팬케이크처럼 폭삭 주저앉았다.”
홍 소방위는 대부분 건물을 볼펜 굵기 정도의 가느다란 철근 기둥이 지탱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경악했다고 한다. 한국을 비롯한 각국 구조대원들의 활동은 생존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몬타나 호텔에 집중됐다. 안타깝게도 체류하는 기간에 생존자는 찾을 수 없었다.
세계 43개 팀 1739명의 구조대원이 모인 현장은 또 하나의 국제무대였다. 구조역량이나 장비 수준, 활동 수칙들이 바로바로 비교되었다. 비록 생존자는 찾지 못했어도 한국 대원들의 명성은 높았다고 한다. 가장 일찍 현장으로 나가 누구보다 늦게까지 체류하며 몸을 사리지 않아 호평을 받았다. 칠레 파라과이 멕시코 구조팀장은 직접 찾아와 합동작업을 요청했고 한국 대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는 것.
“최첨단 장비에서부터 생존자와 시신을 구분해내는 구조견 ‘백두’와 ‘마니’의 실력까지 최고의 평가를 받아 ‘빌려 달라’는 주문도 많았다. 유엔군 부사령관은 한국 대원들에게 가장 어려운 지역 탐색을 요청하는 등 세계가 한국에 보내는 믿음이 각별했다.”
겨우 망치 정도의 장비가 전부였던 멕시코 니카라과 파라과이 엘살바도르 지역 대원들의 부러움 섞인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
홍 소방위는 “우리가 이렇게 잘사는 나라였나, 그리고 남들(다른 나라)로부터 이렇게까지 인정을 받고 있는 나라였나, 밖에 나가 보니 느낄 수 있었다”며 “그동안 너무 우리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비하하며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졸업과 군 제대 후 직장을 잡지 못해 청년백수 생활도 잠시 했고 부친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가족 부양을 책임져야 하는 장남으로서의 압박감 때문에 30대를 힘들게 보냈다고 했다. 소방관이 되어서도 박봉에다 위험하고 불규칙한 생활, 치매를 앓는 조모와 몸이 약한 모친을 부양하고 아이들 사교육비까지 대야 하는 빠듯한 삶이라 사는 게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티가 그를 바꿔 놓았다.
“내가 얼마나 배부른 타령을 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다 보니 물질의 풍요로움이란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티를 가보니 인간에게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면 짐승의 삶보다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빈부격차란 것도 가난한 나라일수록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도와주는 일인 내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도 더 생겼다. 어느덧 권태기에 들어서 무덤덤했던 아내 얼굴도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고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수줍은 듯 달아올랐다.
아쉬웠던 것은 지구 반대편의 장거리인 데다 비자와 장비운반 문제로 미국으로 바로 가지 못하고 유럽을 돌아가야 해 가는 시간만 사흘이 걸린 것. 그 바람에 구조 활동이 늦어져 생존자를 구하지 못하고 시신만 발굴한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제일 부러웠던 게 군용기를 타고 재빨리 현장에 도착해 구호 활동을 벌인 선진국 구호팀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 재난소식을 들으면 바로 출동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홍 소방위는 몇 년 전 싱가포르에서 교육받았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작은 도시국가이지만 소방조직이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것을 보고 그 나라 교관에게 “이 작은 나라에 무슨 재난이 많다고 조직이 이렇게 방대하냐”고 묻자 “우리의 구조대상은 작게는 동남아, 크게는 세계 전체”라는 답이 돌아왔다는 것. 그의 말을 들으면서 기자는 이제 우리나라도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되었지만 단지 돈을 내는 차원을 뛰어넘어 국가적 구호 활동까지 격을 높이는 글로벌 마인드가 진정한 국격(國格)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홍 소방위는 미국의 구호 활동이 가장 인상 깊었다고 했다. 아이티 공항부터 시작해 미군이 ‘점령’을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워낙 수도 많았지만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보여준 그들의 휴머니즘은 직업정신을 뛰어넘은 그 무엇이 있어 보였다는 것.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하니 미국이 아이티에 무슨 속셈이라도 있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현장에서 만난 미군과 구조대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보여준 진심과 헌신은 보는 이를 숙연하게 했다.”
“평소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홍 소방위지만 아이티 현실을 보면서 새삼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도 깨달았다고 한다.
“몬타나 호텔에서 내려다본 아이티의 자연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람들도 교육수준이 낮아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손놀림도 빠르고 성실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엉망진창이 되었으니 문제는 자원이나 땅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의 힘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방황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할 수 있다면 아이티를 보여주고 싶다”며 다시 일터인 또 다른 구조현장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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