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85>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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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9일 03시 00분


왕-귀족 상징 아닌
‘평민의 꽃’ 國花로
“민주적 전통 입증”

1926년 ‘무궁화는 잘도 핀다’는 제목과 함께 동아일보에 실린 무궁화 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6년 ‘무궁화는 잘도 핀다’는 제목과 함께 동아일보에 실린 무궁화 사진. 동아일보 자료 사진
《“무궁화는 아침에 이슬을 먹으며 피었다가 저녁에 죽어 버리면 다른 꽃송이가 또 피고 또 죽고 또 피고 하여 끊임없이 뒤를 이어 무성합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무사도를 자랑하는 사쿠라보다도, 붉은색만 자랑하는 영국의 장미보다도, 덩어리만 미미하게 커다란 중국의 함박꽃보다 얼마나 끈기있고 꾸준하고 기개 있습니까.”

―동아일보 1925년 10월 21일자 2면》
조선시대 왕실을 상징하는 꽃은 오얏꽃 즉 이화(李花)였다. 왕궁의 건축물과 관리들의 휘장에 오얏꽃 문양이 널리 쓰였다. 그러나 나라의 명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면서 조선 백성들에게 나라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된 것은 무궁화였다.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말은 1896년 11월 26일 독립협회가 세운 독립문 정초식 때 정동교회와 배재학당 학생들로 구성된 찬양대가 부른 애국가에서 처음 기록에 등장한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연설 때마다 “우리 무궁화동산은…”이라고 외치며 민중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본디 ‘근화(槿花)’ ‘목근화(木槿花)’로 불렸던 무궁화는 상고시대부터 우리 민족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중국 전국시대의 책 ‘산해경(山海經)’은 “동방에 있는 군자의 나라에는 목근화가 많다”고 기록했다. 1910년대 조선광문회가 편찬한 역사서 해동석사(海東釋史)는 고려시대에 중국에 글을 보낼 때 우리나라를 ‘근화향(槿花鄕)’이라고 자칭했다고 전했다.

영국인 신부 리처드 러트는 저서 ‘풍류한국’에서 “프랑스 영국 중국 등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황실이나 귀족의 상징이 나라꽃이 됐으나, 한국은 황실의 이화가 아닌 백성의 꽃 무궁화가 국화로 정해졌다”며 “무궁화는 평민의 꽃으로 한국의 민주적 전통을 보여준다”고 썼다.

일제강점기에 무궁화는 겨레의 얼과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꽃으로 확고히 부각됐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는 창간사 서두에 ‘동방 아시아 무궁화동산 속에 2천만 조선민중은 일대 광명을 견(見)하도다’라고 밝혀 동아일보의 창간정신이 ‘무궁화동산’에 뿌리를 두었음을 선언했다. 1930년 1월 1일부터는 ‘동아일보’라는 제호의 배경에 한반도와 무궁화를 그려 넣었지만 총독부의 명령으로 1938년 제호 밑의 한반도와 무궁화 그림이 삭제되는 아픔도 겪었다.

총독부의 탄압에도 동아일보 지면에는 수시로 무궁화 사진이 크게 실렸다. ‘날마다 새 꽃을 피우는 무궁화’ ‘사는 데 애착심을 가진 무궁화’ ‘가는 비에 저즌 무궁화’ 등의 제목을 곁들인 무궁화 사진은 일제강점기 수난 받는 우리 민족의 모습을 상징했다.

광복 후 1946년 정부는 경찰의 모표와 계급장, 휘장을 무궁화로 교체했다. 1960년 2월에는 무궁화호 열차가 등장했고, 1995년 8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용 방송통신 인공위성 ‘무궁화호’가 발사됐다. 동아일보는 무궁화를 선양하기 위해 1985년부터 매해 4월 초 청계천 옆 광장에서 ‘무궁화 묘목 나눠주기’ 사업을 벌여왔다. 이 사업은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이 되는 2020년까지 36년 동안 계속된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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