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이윤기]천지에 빈 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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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30일 03시 00분


1920, 30년대는 천재 아니면 수재가 문학 동네를 누비던 시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자주 하던 시절이 내게는 있다. 그 시절의 문학에 경도됐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천재나 수재가 문학하는 시대가 아니다. 내가 이런 주장을 공공연히 펼침으로써 문우를 울적하게 만들었던 것은 1990년대 이후 문학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문인은 급격하게 진행되는 산업시대 안방의 드난살이로 전락했다는 풍문이 떠돌 때였다.

문인도 택시기사도 자리 빈다 한숨

천재나 수재가 하나씩 떠나면서 문학판이 일종의 진공 상태가 되는 사태도 나는 더러 목격했다. 진공 지대로 문학 지망생이 몰려들었지만 2000년대 들어서고부터 많은 문인이 열악한 생존조건에 시달린다는 울적한 소리 소문이 나돌았다. 어쩌라는 말인가? 그들은 물었다. 나의 반응은 퍽 자조적이었다. 옛날 문인보다 더 많이 읽고(多讀) 더 많이 생각하고(多想量) 더 많이 쓰는(多作)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지 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욱일승천하던 시대, 마케도니아군의 창 ‘사리사’의 길이는 4m를 넘었지만 스파르타군의 칼날 길이는 60cm에 지나지 못했다. 이 칼로 어떻게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군대와 싸우느냐고 묻는 아들에게 스파르타 어머니는 일렀단다. 몇 걸음 더 다가서서 찌르는 수밖에 없지 뭐.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무수한 문인이 대학 강단으로 떠나면서 문학 동네가 다시 한번 진공 상태가 되어가는 듯하다. 하기야 문인이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하는 사태가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그 소문 듣고 천재나 수재가 문학판으로 몰려든다면 그것도 참 난처한 일이겠다.

네쿠아쿠암 바쿰(Nequaquam vacuum). ‘빈 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 옛말이다. 호로르 바쿠이(Horror vacui)라고도 한다. 기존의 질서 체계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자기네만의 질서 체계를 은밀하게 추구하는 무리를 ‘비밀결사’라고 하지 아마. 인류 역사 책에는 이런 무리가 무수한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정체를 깔끔하게 밝혀낸 예는 거의 없다.

위의 라틴어 옛말은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에 여러 번 등장한다. 에코의 주장에 따르면 천지자연은 빈 데를 용인하지 않는다. 천지자연이 빈 데를 용납한다면 비밀결사에 의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천지 만물, 새로운 구세주의 등장도 언제나,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자연이 이것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새 질서 체계를 꿈꾸는 비밀결사의 존재는 도무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라틴어 옛말을 처음 대했을 때 엉뚱하게도 노자(老子)의 말씀, 상선약수(上善若水), 즉 ‘지극한 도(道)는 물과 같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물의 세 가지 본성 중 하나는 늘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일이다. 늘 낮은 곳으로 흘러 빈 데를 채우므로 물의 본성이 지배하는 천지자연에는 빈 데가 있을 수 없다.

어쩌랴, 돈되는 자리가 한가할까

나는 이 ‘빈 데’라는 말을 ‘진공 상태’로 읽기도 한다. 밀폐된 공간이 아닌 한 진공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밀폐된 공간이 열리면 공기가 순식간에 밀려든다. 그러면 진공 지역은 한순간에 소거되고 만다.

택시 운전기사라는 직업을 예로 들어서 퍽 미안하지만, 글머리에서 내가 속한 문인 집단을 먼저 예로 든 만큼 면죄부를 받았으면 한다. 택시 운전기사로부터 요금이 너무 낮게 책정돼 있다, 연료가 너무 비싸다, 사납금이 너무 많다, 따라서 운전기사의 삶은 고달프기 짝이 없다는 불평을 들었다.

나는 ‘빈 데’ 이론으로 소박한 설명을 시도한 적이 있다. 택시 요금이 다락같이 오르면 사람은 자가용 끌고 나올 테고 그러면 택시 공차율(空車率)이 높아질 것이 아닌가? 연료비와 사납금이 내려 운전기사의 수입이 턱없이 많아진다면 상대적으로 고급 인력이 밀려올 것이 아닌가? 영어 일본어 중국어를 좔좔 지껄이는 사람이 이 시장으로 밀려와서 손님을 받아도 당신은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가?

나는 노동운동은 물론 약간 과격한 파업까지 되도록 지지하는 편이다. 그들에게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치면 지금 그들의 자리가 진공 상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위험하다. 여당이 인심을 잃으면 야당이 그 자리를 채워 버린다는 뜻에서 정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나는 연봉 협상에서 승리해 막대한 연봉을 받게 되는 사람을 조금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상황이 어려워지면 조직은 가장 먼저 이런 사람을 손보는 법이다.

나는 많은 책을 쓰고 번역한 사람이다. 그러나 원고료와 수고비에 연연한 적은 거의 없다. 만일에 원고료와 인세를 제대로 챙겨 받았다면 나는 지금 부자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자가 아니다. 내가 부자가 되고 소문이 돈다면 천재나 수재가 몰려들어 내 자리를 차지해 버릴 것이다. 그러면 천재도 수재도 아닌 나는 어떻게 되는가? 보따리를 싸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천지자연에는 빈 데가 없다.

이윤기 소설가·순천향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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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추천 많은 댓글

  • 2010-01-31 18:44:23

    Neququm vacuum은 there is no vacuum 으로, 우리가 비었다고 보거나 생각하지만 사실은 무엇인가로 다 차있다는, 철학적 개념이고, horror vacui 는 the fear of emty spaces.로 그림 graphic에서 빈자리를 모두 메워야 마음이 놓이는 수법을 이르지요. 아랍의 카펫 디자인이나 중세 종교 미술따위도 빈곳을 남기지 않고 가득 채우는 기법을 썼죠.동양의 '비움의 아름다움;과는 정 반대입니다.두 말이 비슷한 것도 아니고 님들 말 처럼 '비밀결사'같은 무시 무시한 말도 아니죠.

  • 2010-01-31 08:57:26

    동감

  • 2010-01-30 11:35:01

    롤러코스트(천지자연)는 빈 데가 없다가 아니라 타고 앉아 있으니 믿고 만족만 하면 나몰라라? 하는 일이라곤 종착까지 탈선하지 말아라? 작가라기보다는 도리가없는 전문 뛰어난 번역가이라면 딱 적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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