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아무리 우긴대도 MBC 엄기영 사장은 알 것이다. 인간광우병을 다룬 ‘PD수첩’이 오보인지 아닌지를. 왜냐하면 엄 사장은 사실(fact)을 중시하는 기자 출신이기 때문이다. 단 하루라도 언론사 물을 먹었다면 무엇이 오보인지 기자는 안다. 그래서 기자에게 “넌 기자가 아니다”라는 말은 “넌 인간도 아니다”보다 치욕적이다.
對국민 사기에 전파盜用까지
2008년 4월 29일 방영된 PD수첩은 “미국에선 광우병 의심소가 무차별 도축되고 있고, 이 때문에 한 여성이 인간광우병으로 죽었는데, 이명박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미 쇠고기협상을 타결했다”로 요약된다. 제대로 된 언론사라면 게이트키핑이 있어 사실과 다른 보도가 나갈 수도 없지만, 만에 하나 보도되더라도 대체 왜 문제가 되는 건지 알아봐야 정상이다. 엄 사장은 그러지 않았다. 사장이 아니래도 기자로서, 선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안 한 채 월급을 받아온 것이다.
여기까지는 무능하거나 무책임해서라고 치자. 그러나 형사단독 1심 재판에서 무죄판결이 난 뒤 1월 26일 PD수첩이 국민의 재산인 전파를 8분 27초나 잡아먹으며 무죄 홍보방송을 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재판 중에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방송해서는 안 된다’는 방송심의규정 11조를 모른다 해도, 자사(自社)의 변명을 정규방송으로 내보내는 건 전파를 사유물로 착각하지 않은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엄 사장이 방송 내용을 알고도 허락했다면 사장 할 자격이 없다. 몰랐다면 있으나마나한 식물사장이란 얘기다. 막으려 했으나 영(令)이 먹히지 않았을 경우 더 망신이다. 말끝마다 ‘공영방송 수장’임을 강조하는 그가 바지저고리 아닌 ‘버버리맨’이라 해도 이럴 순 없다.
문제의 PD수첩이 사실을 왜곡했는지 아닌지는 한 가지만 봐도 명백히 알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이 인간광우병으로 죽었다고 주장하는 환자의 어머니는 분명 “MRI검사 결과 아레사가 CJD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요”라고 영어로 말했다. 이것을 PD수첩은 자막에서 ‘vCJD’로 고치고는, 친절하게 괄호 속에 ‘인간광우병’이라고 붙이기까지 했다.
CJD는 광우병과 전혀 상관없는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이다. 인간광우병인 vCJD는 변종CJD(variant CJD)를 말한다. 설령 아레사 어머니가 ‘CJD의 한 변종(a variant of CJD)’을 언급했다 해도 중학교에서 부정관사 a를 배운 사람이면 ‘CJD의 한 변종’과 ‘변종CJD’가 다른 걸 안다. 그런데도 PD수첩은 “환자의 엄마가 혼용했기에 의도를 살려 바꾼 것”이라고 주장했고, 문성관 판사는 “CJD의 한 변종이란 인간광우병을 의미한다”며 무식하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기자이길 포기한 延命術 역겹다
PD수첩은 중학생만 돼도 유심히 보면 금방 알아냈을 새빨간 거짓말로 전 국민을 속였다. 자유민주주의를 뒤엎어 이 정부의 명줄을 끊으려는 세력이 이를 적극 활용한 건 물론이다. 진작 엄 사장이 자체조사를 하고 엄중히 징계했다면 사태는 커지지 않았을 수 있을지 모른다. 공영방송 MBC의 이미지도 어느 정도는 회복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도 엄 사장이 입때껏 나서지 않은 이유는 ‘사장감’이 아닌 사람이 자리보전에 급급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자로서 비겁하고 선배로서 비굴하다. MBC에 호의적인 미디어오늘조차 작년 12월 23일 “그가 겉보기보다 정치적이고 자신의 처지만을 살피는 인물이어서 큰 책임을 맡는 것은 무리라고 MBC 노보에서 평가했다”고 전할 정도다. 사내 구성원에게는 “부당한 압력에 맞서겠다”고 큰소리치면서도,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앞에선 너무나 공손하게 개혁을 약속하고 마냥 시간만 끈다. 오죽하면 방문진의 한 이사가 “엄 사장이 MBC에 이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기보신 능력은 완벽하다”며 그의 허허실실 연명(延命)전술에 속는 것 같다고 하겠나.
한때 정상(頂上)의 방송사였던 MBC를 나는 기억한다. 과거 정권을 거치면서 특정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사람들이 진지를 구축하곤 뉴스부터 오락프로까지 색깔을 쳐 넣으니, MBC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통탄할 일이다. 한겨레나 경향신문이면 몰라도 아직은 명목상 공영방송인 MBC가 이래선 안 된다. ‘방송은 민주적 기본질서를 존중해야 하고, 보도는 공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방송법을 MBC가 정면으로 어기는데 엄 사장은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이를 방치하고 있다.
지금은 하늘을 쓰고 도리질하는 기분일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을 언제까지나 우롱할 순 없다. MBC 어딘가에 일말의 기자정신이 남아 있다면, 해사(害社) 행위를 거듭하는 엄 사장에게 “책임을 지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MBC가 대국민 사기극을 청산하고 정상(正常)의 방송으로 살아남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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