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최영해]오바마와 맥주 게임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1일 03시 00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신년 국정연설을 한 지난달 27일 오후 9시(현지 시간)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의 한 주점.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모여 앉았다. 이들은 두 팀으로 나눠 오바마 대통령이 ‘Let me be clear(확실하게 짚고 넘어갑시다)’라고 말할 때마다 맥주를 한 번씩 들이켜기로 했다. 또 다른 팀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거론되면 맥주를 들이켜기로 했다. 두 표현은 ‘연설의 달인’으로 불리는 오바마 대통령이 개혁을 강조할 때 즐겨 쓰는 것이다. 대학생들이 새해 국정연설에서 이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올까 내기한 것이다. 요즘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게임이다. ‘변화(change)’를 외치고 많은 미국민을 감동시키며 탄생한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의 언행은 1년 만에 미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맥줏집 안줏거리가 돼 버렸다.

오바마 대통령이 건강보험개혁법안 얘기를 꺼낼 때마다 반드시 쓰는 단어가 바로 ‘Let me be clear’다. 경기부양책이 잘못됐다는 비난의 화살이 돌아올 때는 어김없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을 거론한다. 건강보험 개혁에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두는 것과 정책 실패에 대해 전임 정부 탓을 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화법을 겨냥한 게임이다. 여느 연설 같으면 내기를 한 대학생들이 얼큰하게 취했겠지만 이번 국정연설은 달랐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70여 분 동안 연설하면서 이 표현들을 각각 한 번밖에 쓰지 않았다. 건강보험개혁법안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대목과 경기부양책이 부시 행정부의 실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얘기할 때였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일자리 창출’에 대부분의 연설시간을 할애했다.

1년 전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간 후 가장 먼저 손댄 것은 경제 살리기와 건강보험 개혁이었다. 개혁을 저지하려는 워싱턴의 로비스트와 욕심 많은 월가(greedy banks), 건강보험법안에 반대하는 보험사에 대해 “싸우고 또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정작 국민들이 오바마의 개혁에 등 돌린 이유는 이 두 가지 개혁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경제를 살려놓겠다던 8780억 달러의 경기부양자금은 숨이 막 넘어가던 월가와 거대 자동차회사만 톡톡히 수혜를 봤을 뿐 국민들은 구경도 못해봤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경제가 살아나면 1년 뒤 실업률이 8.0%로 떨어질 것이라는 약속은 빗나갔다. 막대한 국민세금으로 기사회생한 월가에선 보너스잔치로 흥청망청한다. 경기부양자금은 서민들의 생활을 나아지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화만 돋우게 했다. 1년 전 ‘희망’은 지금 보통 사람들에게 ‘절망’으로 바뀌었다. 일자리를 잃은 국민들은 대통령의 현란한 말잔치에 더는 매료되지 않고 있다.

실업의 칼바람이 불어닥쳤는데도 오바마 대통령은 오로지 건강보험 개혁에 1년을 다 걸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개혁의 당위성은 인정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노약자와 장애인마저 건강보험 개혁에 밀려 지금 받고 있는 혜택이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국민들은 ‘작은 정부’를 원했지만 오바마 행정부는 몸집을 부풀려 갔다.

다행인 것은 이제야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챈 것 같다는 점이다. 어떤 개혁도 일자리보다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자신의 말마따나 그저 그렇고 그런 연임 대통령보다 화끈한 단임 대통령을 꿈꾸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다름 아닌 일자리 만들기였다.

최영해 워싱턴 특파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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