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신연수]구본무 회장의 신의와 배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1일 03시 00분


뜻밖이었다. 그런 말이 대기업 총수가 아니라 노조위원장에게서 나올 줄은 몰랐다.

“빌 게이츠는 ‘자본주의가 가진 자 중심의 부(富) 축적으로 가면 안 된다.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사회가 발전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큰 감명을 받아 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했습니다.”

LG전자 노조가 지난달 28일 국내 최초로 ‘노조의 사회적 책임(USR)’을 발표할 때 박준수 위원장이 한 말이다. 불황기에도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린 LG전자의 노조원은 우리 사회 88만9000명(공식 집계 기준)의 실업자에 비하면 ‘가진 자’임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로 하여금 스스로를 빌 게이츠의 반열에 놓고 경영자의 시각에서 회사와 사회를 걱정하게 한 배경은 뭘까.

노조는 이날 생태계를 보호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노조와 회사의 투명성을 높이고 현장 경영자로서 경영혁신을 주도하는 것도 노조의 사회적 책무라고 선언했다. 남용 부회장은 이에 화답하며 “오늘은 나도 동지로 불리고 싶다”면서 “LG전자가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데 지금까지처럼 노조가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두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거나, 노사갈등으로 해마다 파업을 하는 기업이 수두룩한 것을 생각하면 LG전자 노사의 이런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 전날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계열사 신임 임원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경영자에게는 신의(信義)가 생명”이라며 “어떤 상황에서도 약속을 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나 사회 지도자도 아니고 변화무쌍한 비즈니스의 세계를 너무 잘 아는 최고경영자가 신의를 강조한 것이다.

구 회장은 평소에도 “경영자는 약속을 신중하게 해야 하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해 왔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뒤숭숭하던 2008년 말 구 회장은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거나 안 뽑으면 안 된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이날 구 회장은 ‘배려’도 강조했다. 임원들이 먼저 직원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면 직원들은 결코 임원에게 다가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20년 무파업의 전통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닌 모양이다.

이는 ‘1등이 되기 위해서는 모두의 상상력이 필요하다’며 ‘자율과 창의’를 강조하는 경영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세상이 워낙 빠르고 다양하게 변하기 때문에 소비자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가치’를 기업이 먼저 제시하기 위해서는 리더 한 사람의 생각만으로는 부족하고 다수의 창의력이 필요한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고(故) 구인회 창업자 때부터 ‘인화(人和)’를 중시했던 LG그룹은 이미 한국 기업사에 독특한 궤적을 남겼다. 경영권을 놓고 형제끼리도 다투는 세상에 구씨와 허씨 일가는 57년간이나 함께 경영을 했다. 유독 형제가 많은 두 집안이 2004년 GS, LS 등으로 분리될 때도 잡음이 나오지 않았다. LG는 필립스 칼텍스 등 외국 회사들과도 오랫동안 합작회사를 운영했다. 모두 신의와 배려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1등이 되기 위해 상대방을 속이거나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하기 쉬운 사회, 정치계 법조계 언론계마저 네 편 내 편으로 나뉘어 싸우는 몰지각한 세상에서 LG는 새로운 모델을 창조해나가고 있다.

신연수 산업부장 ysshi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