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한 직업 열댓개… 43세때 제 2인생 결심
사물놀이서 태평소 불다 2년후 가수 데뷔
“하고싶었던 일하면서 얼굴까지 활짝 폈슈”
‘사실상 백수’가 400만 명을 넘어선 나라. 6·25전쟁 직후 태어난 전후 ‘베이비 부머’ 1세대의 본격 은퇴가 이미 시작된 사회. 직장 없고 벌어 놓은 것 없이 가르치고 결혼시켜야 할 자식들만 혹처럼 달려 있는 이들은 어디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2주 앞으로 다가온 설날은 또 어떻게 치러야 할까.
우리 시대의 소리꾼 장사익 씨(61)를 느닷없이 서울 종로구 홍지동 집으로 찾아간 것은 그의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와 환한 웃음을 대하면 어느 정도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가 겪은 인생 전반기의 신산(辛酸)한 삶과, 들을 땐 슬프면서도 듣고 나면 가슴이 후련해지는 그의 노래에 얽힌 사연들을 듣고 싶어서였다. 그의 노래에는 ‘슬프면 더 슬프게 하고, 기쁘면 더 기쁘게 해서 사람들의 맺힌 한과 숨겨진 신명을 풀어주는’ 살풀이 같은 힘이 있다. 그는 2층에서 양말도 신지 않고 달려 내려와 “아이고, 지가 뭔 그런 얘기에 보탬이 될 게 있겄시유. 차나 한잔하시고 놀다 가시면 되지유”라며 방문객을 맞는다. 나는 그의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와 선한 얼굴을 정말 좋아한다. 그에게는 토종 한국인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10분 이상 대화를 나누면 소탈, 순박, 고지식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사는 것이 즐거우십니까.
“그냥 맘 편히 사니께유. 인생 뭐 별거 있겄시유. 그냥 일하고 놀다 가는 거지유.”
―장례식장에서도 망자(亡者)를 위해 노래를 부르셨다던데….
“엄니가 돌아가셨을 때 상주인 지가 ‘비 내리는 고모령’을 선물로 불러 드렸시유. 경제학자이자 언론인인 정운영 선생의 영결식에서는 ‘봄날은 간다’를 불렀고, 신영복 선생 출판기념회에서는 ‘동백아가씨’를 불렀시유. 작가 이청준 선생 장례식에서는 미당의 시에 곡을 붙인 ‘황혼길’을 불러 드렸지유. 원래 장례는 돈만 내고 공허한 대화만 나누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한바탕 푸지게 놀다 가는 것이지유.”
늘 웃는 얼굴로 천하태평인 것 같지만 그가 살아온 인생은 결코 간단치 않다. 새우젓으로 유명한 충남 홍성군 광천읍 농가에서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시골 생활을 견디다 못해 상경했다. 선린상고 3학년 2학기 때 처음 취직한 보험회사 사무직을 시작으로 25년 동안 무역회사 사무직, 가구점 직원, 독서실 주인, 카센터 사무장 등 열댓 개 직장을 전전했다. 그의 말처럼 한마디로 ‘별 볼일 없는’ 인생이었다.
―왜 그렇게 직장을 전전하셨습니까.
“지가 원래 자발(참을성)이 없시유. 학벌도, 능력도 없구. 술 담배도 못해유. 근데 꿈은 많아유. 지 이름이 생각 사(思)에 날개 익(翼)이니 생각이 날아다니지 않겄시유.”
나이 마흔세 살이 지나던 1992년 말 그는 제2의 인생에 도전해 보기로 작심한다.
“이건 아니여. 열심히 산다고 했지만 최선을 다해 산 것은 아니잖여. 이제부턴 증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봐야 할 티여.”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10가지를 죽 적어 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 맨 마지막에 쓰인 ‘태평소’를 찍었다. 1980년대 초부터 거의 독학으로 배워둔 태평소를 한 3년간 죽기 살기로 불어보자고 결심한 것이다. “한 푼도 돈 달라는 소리 안 할 테니 시켜만 달라”고 졸라 평소 팬으로서 인연이 있던 이광수 사물놀이 패에 합류했다. 태평소는 사물놀이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악기였지만 얼마 안 가 그의 태평소는 ‘화룡점정(畵龍點睛)’ 격 악기가 됐다. 전주대사습놀이와 전국민속경연대회 등에서 대상을 휩쓸었다. 그의 진가는 특히 사물놀이 끝에 벌어지는 뒤풀이에서 드러났다,
“‘봄비’ 그게 18번이구, ‘님은 먼 곳에’ ‘동백아가씨’ 등을 신명나게 불러 제꼈쥬. 아주 끝내줬슈. 무대에선 내가 주인공이 아니지만 뒤풀이에선 내가 완전 스타여.” 첫 직장이 서울 종로2가여서 근처인 낙원상가 학원에서 3년 동안 노래를 배운 것이 ‘가수 수업’의 전부였던 그다.
1994년 여름 ‘괴짜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그를 찾아왔다. “형. 세상에 나가.” “아이구 내가 나이가 몇인데….” “형 걱정 마. 우리가 한번 뒤집어지게 놀아 보자고.” 그해 11월 그는 서울 신촌의 소극장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그리고 단박에 가요계를 뒤집어 놓았다. 그의 나이 마흔다섯이었다. 대표곡 ‘찔레꽃’이 수록된 첫 음반 ‘하늘 가는 길’ 이후 ‘기침’ ‘허허바다’ ‘꿈꾸는 세상’ ‘사람이 그리워서’에 이어 지난해 6집 음반 ‘꽃구경’까지 냈다. 어느새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우리 시대의 소리꾼’으로 우뚝 섰다.
그는 단순한 가수(歌手)가 아니다. 소리꾼 또는 민중 딴따라라고 해야 한다. 단순히 한국적이고 서민적이라는 의미만은 아니다. 제도권 안에 있지 않으면서 제도권을 압도하는, 또 그 이상을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그의 노래에는 있다. 조용필이 국민가수 또는 가왕(歌王)이라면 그는 토종가객(歌客) 또는 가혼(歌魂)이라고 불러야 옳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열렬하게 장사익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노래는 정성인데, 지가 기를 쓰고 피 토하듯 정성을 다해 노래하는 것을 좋게 봐주시는 것이겠지유.”
―노래는 슬프지만 얼굴은 태평합니다.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하루하루가 모여 일생이 됩니다. 즐겁고 슬픈 얘기들 엮어 노래를 부릅니다. 세상이 참 아름답고 살 만합니다’라는 글을 남겼더군요. 진면목(眞面目)은 무엇인가요.
“전 늘 즐거워유. 노래를 부르기 전엔 얼굴을 찡그렸지만,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후 얼굴이 펴졌슈. 아무래도 웃는 사람이 복 받고 일거리도 생기는 게 아니겄시유. 지 노래가 대부분 슬픈 건 사실이지만 슬퍼서 짜증나는 게 아니라 울고 나서 후련해지는, 뭐라나 카타르시스가 된대유. 그걸 ‘생산적 슬픔’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유.”
―자신의 음악적 미래를 낙관하시나요.
“예. 지는 아흔까지 노래를 부르겄시유. 지금은 힘과 테크닉으로 노래를 부르지만 그때는 저만의 ‘노인네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생각만 해도 즐겁구먼유.”
―데뷔 무대를 마련하고 첫 음반에 반주를 맡았던 피아니스트 임동창 씨와는 그 후 작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결별한 건가요.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이지유. 지 노래의 길을 터 준 참 고마운 친굽니다. 길을 가다 보니 견해도 생각도 달라 각자의 길을 가게 됐지유. 비틀스의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 사이먼과 가펑클도 그랬잖아유. 요즘은 1년에 한두 차례 정도나 연락이 됩니다. 뭐니 뭐니 해도 피아노 연주는 동창이가 최고지유.”
―가족 관계는…. 자녀들은 뭘 하나요.
“나이 차이가 좀 있는 사랑스럽고 무던한 마누라와, 결혼한 두 아들이 있지유. 아들 둘이 모두 대금을 하는데 큰애는 국립국악관현악단, 작은애는 정동극장 단원으로 일하고 있시유.” 그의 집에는 부부의 자필 사인이 새겨진 백년가약서가 있다. ‘하늘 고완선과 땅 장사익은 금후(今後) 100년 동안 항상 사랑하고 존경하고 늘 행복함을 유지시킨다는 약서(約書)를 씁니다. 단, 100년 후에는 영원(永遠)으로 계약조건을 변경합니다’라는 내용이다. 결혼 때 장 씨가 직접 쓴 글이다. 이 집에서는 아내가 하늘이고 남편이 땅이다. 하지만 부부는 기자 앞에서 서로를 “산만하고 정신이 없다”고 공격한다. 귀엽다(?).
―공연 표 구하기가 어렵다, 개런티가 비싸다, 스케줄 잡기가 힘들다는 불만도 나옵니다.
“지가 그런 일에 참 서투르구먼유. 친한 사람이 많고 거절을 못해서 일정을 관리하는 집사람이 지 때문에 욕을 많이 얻어 먹지유….”
―국내 가수 중에는 누구를 치나요.
“생존해 기신 분 중에는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선생님이지유. 돌아가신 분 중에는 배호 선생님이 최고여. 그분이 스물아홉에 돌아가셨는데 그 나이에 부르신 노래를 지금 내가 이 나이가 돼서 불러도 그 필(feel)이 안 나오는구먼유.”
―직장을 잃거나 은퇴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지 경험에 비추어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유. 만약 지가 처음부터 가수가 되겠다고 생각했으면 오늘의 지는 없을거구먼유. 절박할수록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넉넉하게 생각해야 해유. 사람은 누구나 꽃을 피울 때가 있다구 믿어유. 그게 인생이여유.”
그의 고음을 따라가기 힘든 것처럼, 그의 생애를 본떠 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혹독한 겨울이 지나면, 어김없이 봄날은 온다.
오명철 기자 oscar@donga.com ▼장사익의 단골노래 & 뒷얘기▼
▽찔레꽃=지 인생이 제일 밑바닥일 때 만든 노래라 특히 애착이 가는구먼유. 아파트 주변 장미꽃이 활짝 폈는데 기막힌 향기가 나기에 냄새를 맡았더니 아무 냄새도 안 나. 주변의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작은 꽃에서 기막힌 향기가 나는 거예유. 이 꽃이 바로 나구나 하는 심정으로 만들었쥬.
▽하늘 가는 길=외국 사람들이 ‘한국의 레퀴엠’으로 치는 노래쥬.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벚꽃 터널 속으로 상여를 몰고 가면서 “야, 나도 이런 계절에 꽃상여 타고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고 하셨던 것을 기억하며 만들었슈.
▽국밥집에서=인생에 회한을 느끼는 심정을 담았쥬. 요즘도 가끔 인사동에서 작사를 한 친구와 마주치는데 꼭 노래처럼 그곳에서 그 노래를 부르고 있지유.
▽아버지=허형만 선생님의 시를 보니 완전 우리 아버지가 지한테 하시던 얘기여. 그래서 만들었쥬. 우리 엄니 아버지는 그래도 지 잘되는 것 보고 가셨어유.
▽동백아가씨=우리나라 대중가요 중 최고의 노래쥬. 외국 가서 동포들 앞에서 그 노래 부르면 다 끝나 버려유. 앙코르곡으로 많이 불러유.
▽봄비=신중현 선생님은 천재예유. 리듬 멜로디가 지금 불러도 시대를 앞서가는 노래가 아닌가 생각해유.
▽님은 먼 곳에=멜로디 전개가 죽이쥬. 김추자 씨의 가창력과 모션도 기맥히구.
▽대전 부르스=기맥히쥬. 보통 2부 첫 번째 노래로 부르는데 분위기가 순식간에 완전 나이트 분위기로 바뀌쥬. 블루스 대표곡이랄 만하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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