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의 사람 이야기]故이병철 회장 평전 한-일 동시 출간한 야마자키 가쓰히코

  • Array
  • 입력 2010년 2월 8일 03시 00분


“호암은 자신이 뽑은 인재가 커나갈때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암투병 하면서도 초연한 모습
남의 말 잘들어주고 절제 강해

日선 무척 존경받았을 기업인
고인을 제대로 평가하고 싶어”

노(老)신사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1987년 8월이었으니 작고하기 3개월 전입니다. 도쿄 오쿠라 호텔 방에서 얇은 가운을 입고 쉬고 있던 호암 이병철 회장을 만나러 갔지요. 계절마다 도쿄에 올 때 두세 번씩 만났거든요. 이미 2년 전 폐암 진단을 받았던 터라 병이 악화되고 있는 중이었는데도 표정이나 목소리는 담담했습니다. 그런데 얼핏 가운 사이로 드러난 가슴을 보는 순간 놀라고 말았습니다. 나무판처럼 바짝 말라붙어 있었어요.”

그날 호암은 “야마자키 씨, 가을이 되면 꼭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고 한다.

이국(異國)땅에서 기자와 기업인으로 시작된 인연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1970년 3월, 호암은 스물다섯 살이나 아래인 일본인 기자에게 마음을 열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서울특파원으로 부임해 호암을 처음 만났던 야마자키 가쓰히코 씨(75)는 호암에 대한 첫인상으로 “온화하고 인자하지만 뭔가 모르게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느껴졌던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호암 이병철 회장과 17년간 교유하며 그의 업적과 인간적 매력에 반해 호암 사상을 연구하고 평전까지 낸 저널리스트 출신 일본 경제인 야마자키 가쓰히코 씨. 그는 “사업을 일으켜 가난에 빠진 국민과 나라를 구하겠다던 호암의 뜻과 성취에 비하면 한국인들이 보여준 평가는 인색했다”며 “일본을 그토록 이기고 싶어 했던 호암이 살아 돌아와 지금의 한국과 삼성을 본다면 얼마나 가슴 벅찰 것인가”라고 말했다. 서영수 전문기자
호암 이병철 회장과 17년간 교유하며 그의 업적과 인간적 매력에 반해 호암 사상을 연구하고 평전까지 낸 저널리스트 출신 일본 경제인 야마자키 가쓰히코 씨. 그는 “사업을 일으켜 가난에 빠진 국민과 나라를 구하겠다던 호암의 뜻과 성취에 비하면 한국인들이 보여준 평가는 인색했다”며 “일본을 그토록 이기고 싶어 했던 호암이 살아 돌아와 지금의 한국과 삼성을 본다면 얼마나 가슴 벅찰 것인가”라고 말했다. 서영수 전문기자
야마자키 씨는 호암이 폐암 진단을 받고 난 직후인 1985년 어느 날 ‘좋은 죽음’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호암은 “인간인 이상 생로병사를 피할 수는 없겠지요. 불치병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차분히 떠난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理想)에 지나지 않는 것 같고…. 적어도 살아서 아등바등하는 흉한 꼴만은 남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라고 했다고 한다. 야마자키 씨는 “한 번도 호암으로부터 ‘힘들다’ ‘괴롭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요. 사는 순간까지 삶만을 생각하며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단순한 기업인을 넘어 구도자(求道者)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라고 전한다.

야마자키 씨는 “따뜻하면서도 강인했고 겸손하면서도 결단력이 넘쳤던 호암의 성정(性情)에 반해 그의 삶과 사상을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2일 호암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에 펴낸 그의 호암 평전 ‘크게 보고 멀리 보라’(김영사)에는 우리가 잘 모르던 호암의 내면이 많이 담겨 있다. 호암 탄생 기념행사와 책 출간에 맞춰 한국을 찾은 야마자키 씨는 뜻밖에 “생전의 호암을 생각하면 애처로운 마음부터 든다”고 운을 뗐다.

“어느 날 무슨 이야기 끝에 호암이 ‘나는 이제껏 국내에서 제대로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고민이나 괴로움이 있다고 해서 하소연하거나 티를 내는 분이 아니었는데 의외였죠. 그날 웃고는 있었지만 쓸쓸했던 호암의 눈빛 때문에 그의 삶을 연구하기 시작했는지도 몰라요. 나 같은 외국인이라도 그를 제대로 평가해 주자는 생각에서 말이죠.”

야마자키 씨가 보는 호암의 삶은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생전에 고인이 자신 스스로의 삶을 ‘천신만고(千辛萬苦)’라고 했듯 커다란 성취 뒤에는 투옥과 비난, 두 차례 암과의 사투, 파산, 전쟁으로 인한 낭인 생활 등이 점철돼 있다.

“큰일 한 사람을 찬양하고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강한 일본 문화와 비교해 볼 때 사실 한국 사회는 생전 이 회장을 평가하는 데 있어 혹독했고 심지어 부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존경이나 경의보다는 ‘졸부’ ‘매판자본가’라는 야유를 보낼 때가 많았으니 이 회장은 그런 점에서 불쌍한 분입니다.”

야마자키 씨는 “달러가 없어서 수입을 못해 국민들이 단 것을 먹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제당공장을 지었더니 ‘물자가 부족한 틈을 타 돈 벌려는 장사꾼’이라고 하질 않나, 미국 대학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더니 기부금을 낸 대가라고 하질 않나, 자본, 기업, 기업가는 무조건 악덕하고 반사회적이라고 매도하는 식이었으니 당시 ‘한국 사람들은 성의, 선의, 우정, 존경 같은 가치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구나’라고까지 생각했어요.”

야마자키 씨는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를 비롯해 일본의 많은 훌륭한 기업인들의 삶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그들에겐 호암이 겪었던 여론의 차가운 시선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잘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시기나 질투심이 일본인들에게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대다수 일본 국민들은 위대한 업적을 이룬 기업인들을 정말 마음속으로 존경합니다”라고 소개했다.

그는 어느 날 호암에게 “세상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면서 왜 그렇게 힘든 사업을 열심히 하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뭘 새로 만드는 것을 즐기는 ‘창조적 충동’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호암은 ‘머릿속에 늘 10가지 이상의 사업 프로젝트가 소용돌이치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어요. 그런 사업가적 충동에는 국민을 가난에서 구하고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하고 자신감을 잃은 국민정신에 활기를 불어넣어 강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게 깔려 있었지요.” 기업을 통해 국가와 사회, 나아가 인류에 공헌하고 봉사하겠다는 이런 호암의 정신을 삼성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가 보기에 호암은 돈이나 명예를 초월해 ‘다른 어떤 것’을 좇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미 자신과 가족이 살아가기 위한 돈이라면 제일제당, 제일모직의 성공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끊임없는 시련 속에서도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내 새로운 기업을 세우고 합리적으로 운영하면서 창조의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야마자키 씨는 전했다. 특히 호암은 자신이 뽑은 인재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제일 아름답고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호암의 또 다른 경영 철학인 ‘인재제일(人材第一)’을 표현한 대목이다.

가까이에서 봐 온 인간 호암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경청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30분이고 1시간이고 남의 말을 참 잘 들어 주었습니다. 또 ‘나는 두 눈으로 15만 명의 사원을 보지만 사원들은 30만 개의 눈으로 나를 보고 있다’면서 자기 절제도 강했습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오후 10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꽉 짜인 스케줄에 따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움직이는 단정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가끔 신선로 같은 옛 궁중 요리도 즐겼지만 식사도 대개 일반 시민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야마자키 씨는 “호암을 생각하면 인간의 의지와 그것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 앞에서 고개가 숙여진다”며 “부디 탄생 100주년이 비록 그와 함께하지는 못한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그러나 바로 얼마 전까지도 함께 호흡했던 한 영웅의 덕과 정신을 기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노신사는 “‘제가 이렇게 당신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하고 보여주고 싶어 한국에 왔다”며 성묘를 간다고 했다. 말투와 눈빛에서 고인에 대한 순도 높은 존경심이 묻어 나왔다.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우리나라 기업인을 기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 요즘 한창 유행하는 ‘국격(國格)’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우리에겐 ‘위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위인을 기리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지, 그런 질문이야말로 우리 스스로를 높이는 국격의 출발이 아닐까.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美명문 보스턴-뱁슨大
“이회장 경영철학 대단”
名博-최고경영자상 수여▼


야마자키 가쓰히코 씨는 책에서 생전에 이병철 회장은 한국보다는 해외에서 더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1982년 4월 미국 동부 명문 보스턴대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학위를 수여한다고 했을 때, 호암은 “나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극구 사양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스턴대 측은 ‘국토가 좁고 자원도 없는 한국에서 수십 개의 기업을 창설하고 경이적인 경제 성장에 공헌한 점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한 일이며, 세계 각국에서 후보자를 선정해 충분한 검토를 거쳐 내린 결정이니 꼭 받으라’고 호암을 설득했다는 것. 결국 호암은 거부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수락했다고 한다. 그것도 학위 수여 이야기가 처음 나온 지 몇 년 후였다.

이날 답례 강연에서 호암은 사람을 중시하는 경영철학에 대해 말했고 식장을 가득 메운 청중은 전원 기립박수로 화답했다고 한다. 보스턴대에서는 학위수여식이 열렸던 1982년 4월 2일을 이 회장 이름 이니셜을 따 ‘B.C. Lee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1979년 4월 미국 뱁슨대는 그에게 최고경영자상을 주었다. 뱁슨대는 하버드대 비즈니스스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영학의 명문. 이 대학이 주는 최고경영자상은 기업 경영을 통해 세계 경제 발전에 공헌한 인물을 선정해 기리는 상이다. 호암의 수상은 동양인으로는 혼다의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에 이은 두 번째였다. 당시 호암은 사정상 수상식에 참석하지 못해 부회장이던 3남 이건희 전 회장이 대신 참석했다.

야마자키 씨는 “아버지가 겪어 온 고난의 세월을 잘 알고 있던 이 전 회장이 당시 랠프 소렌슨 총장으로부터 ‘극도로 어려운 환경에서 끊임없는 개척정신으로 성취한 호암의 업적은 사회봉사 그 자체’라는 축사를 들으며 새삼 감격했다는 것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고 소개했다.
:야마자키 가쓰히코:


1959년 와세다대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입사했다. 서울특파원, 도쿄 본사 사회부장, 오사카 본사 편집국장을 지냈다. 닛케이 영상 사장과 회장을 거쳐 현재 경영컨설팅 기업인 엘비에스의 이사를 맡고 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