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도 그겻 집에 잇는 박모가 벽을 바르라고 흙을 파다가 우연히 유리로 만든 구슬이 만히 나옴으로 집어들고 야단을 하는 즈음에 지나가든 일본인 순사 한명이 그것을 보고 즉시 경찰서에 보고하엿든 바 서장 이하 다수한 경관이 현장에 나아가 발굴에 착수한 결과 어든 물건은 지금부터 략 일천사백여년전의 고물인대”
―동아일보 1921년 10월 22일자》 경북 경주는 천년 역사를 가진 신라의 도읍. “밧고랑에 업대어 무심히 김매는 농부의 호미자루에도 녯날의 유물이 걸니어나오는 수가 만핫섯다”고 할 만큼 유물이 많이 묻혀 있으며 그중에서도 금관이 많이 나왔다.
금관 발굴의 시작은 1921년 9월 27일 지금의 경주시 노서동 금관총이었다. ‘경주읍내 봉황대 서편에 잇는 큰 고분에서는 천고의 유물이 다수히 발굴되엿는대 이 고분은 석씨(昔氏)의 능이라고도하며 혹은 당시 어느 신하의 묘라고 하야 임자를 알기 어려운 큰 고분’이어서 대표 유물인 금관의 이름을 따 ‘금관총’이라 불리게 됐다.
금관총 발굴은 다른 금관 발굴을 자극했다. 1924년 금령총에서, 1926년 서봉총에서 금관이 나왔다. 금령총 금관은 다른 금관들보다 작은데 이 무덤에서 금령(金鈴·금방울)이 나왔다고 해서 ‘금령총’이라고 이름 붙였다.
서봉총 발굴에는 당시 고고학자로 이름난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 왕태자가 참가했다. 일본을 방문하고 있던 그는 경도(京都)제국대학 고고학과 주임교수의 권유로 10월 9일 경주에 도착해 이튿날인 10일 오전 납작해진 금관을 목관 속에서 소중하게 들어올렸다. ‘서봉총’이란 이름도 스웨덴의 한자표기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금관에 장식된 ‘봉황(鳳凰)’에서 ‘봉’자를 땄다.
유물유적 발굴에서 조선인은 배제됐다. 총독부의 고적조사보존사업이 조선인에게 식민사관을 강요하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제의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다. 경주 시민들은 총독부가 금관총 발굴 유물을 경성으로 옮기려 하자 “력사!(歷史的)유물은 력사를 배경으로 한 그 디방(지방)에 보관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두 번이나 시민대회를 열었다. (1921년 10월 22일 동아일보) 종교인이자 교육가였던 김교신도 ‘김교신전집’에서 “경주 고적보존회에서 안내자가 왔으나 그 행정프로그램의 입안(立案)이 저열함을 보아… 우리가 소지한 지식대로 자유롭게 구적(舊蹟)을 찾기로 하다”라고 적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동아일보에는 금관을 비롯한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기사가 실렸다. 1939년 4월 23일 ‘지상(紙上)수학여행-경부선편 경주행(行)’ 기사에서는 “이것은 확실히 신라임금께서 쓰시든 왕관이 분명한데 적어도 일천사오백년전의 것이랍니다”라며 학생들의 관심을 당부했다.
한국인이 주도한 첫 고고학 조사는 1946년 경주 호우총 발굴이었다. 현재까지 발굴된 신라 금관은 1973년 천마총 출토 금관과 1974년 황남대총 출토 금관까지 합쳐 모두 6점이며 대규모 해외전시에는 꼭 포함돼 ‘황금의 나라’ 신라를 증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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