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친지가 한자리에 모이고 덕담을 나누는 큰 명절 설을 맞자니 새삼 그리워지는 얼굴이 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가르침을 남기고 지난해 2월 16일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다. 김 추기경은 자유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강인한 버팀목 역할을 하면서도 세상의 약자는 한없는 사랑으로 감싼 너그럽고 부드러운 분이었다. ‘옹기’라고 자칭할 만큼 스스로 낮추는 겸양과 여유도 있었다. 백마디 말보다 조용하지만 무거운 평생의 실천으로 나라사랑 이웃사랑의 참뜻을 일깨워준 시대의 어른이었다. 그저 핏발 선 눈으로 치고받고 싸우며 서로 상처주기에 여념이 없는 정치권과 사회 일각의 성마른 인심을 보노라면 김 추기경 같은 어른이 더욱 그립다.
하필이면 이런 때 이명박 대통령의 9일 발언을 둘러싸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청와대 측이 벌이는 설전을 지켜보자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명절에 일가친척이 다 모였는데 어른 격인 두 사람이 언쟁을 계속하고, 패가 갈려 서로 으르렁거린다면 시시비비는 둘째 치고 볼썽사납지 않겠는가.
그날 충북도청의 업무보고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일 잘하는 사람을 밀어주고 싶다” “잘되는 집안은 싸우다가도 강도가 오면 물리치고 다시 싸운다” 등의 말을 했다. 이에 대해 친박계인 송광호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의원총회에서 “바로 옆에서 들었는데 대통령은 정우택 지사의 설명을 들으며 ‘자치단체장들이 지나치게 정치적인 냄새가 나는데 일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게 내 생각이다’라고 했는데 일부 신문에서 앞뒤 자르고 보도를 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기자들이 이 대통령의 ‘강도론’에 대한 의견을 묻자 “백번 천번 맞는 말씀이다. 그렇지만 집 안에 있는 한 사람이 마음이 변해서 강도로 돌변하면 그땐 또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청와대는 “박 전 대표가 선후관계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대통령을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며 박 전 대표의 직접 사과를 요구했고, 박 전 대표는 “그 말이 문제가 있으면 있는 대로 처리하면 될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 정치권은 여야 간이건, 여당 내 계파 간이건 오로지 ‘나만 맞다’고 하지 ‘네 말도 맞다’는 공감이나 처지를 바꿔 생각하는 자세는 실종되다시피 했다. 결국은 정치적 이익을 서로 더 가지려는 갈등 때문일 테지만 지켜보는 국민으로선 꼭 그렇게 사생결단을 내듯이 해야겠느냐 싶다. 이런 각박한 정치가 삶에 지친 국민을 더 짜증나게 한다는 사실을 정치인들은 느끼지 못하는가. 더 여유 있는 정치, 때로는 양보하는 정치를 할 줄 아는 쪽이 더 돋보일 텐데, 정치가 왜 이리 독해지기만 하는지 명절조차 우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