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저소득층 서민에게 싼 금리로 창업자금을 빌려주는 미소(美少)금융 사업을 시작한다고 발표했을 때 마음속으로 큰 박수를 보냈다. 경제정책의 홍수 속에서 모처럼 사람의 온기를 느껴서였다. 어떤 이들은 대출 재원을 은행과 대기업들이 염출한 것을 들어 ‘정부가 민간의 팔을 비틀어 목표를 관철한 신종 관치금융’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관(官)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민간 은행의 행장으로 앉히려는 시도와 노점용 손수레라도 장만하게 도와 자활 여건을 만들어주려는 정책을 한 묶음으로 취급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빚이 빚을 부르고, 앞 세대의 가난이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만 있다면 그런 관치는 ‘좋은 관치’다.
담보가 없고 신용등급도 낮은 서민들이 불법 사채업자를 찾거나 연리 40%대의 대부업체 돈을 쓰게 된 데는 은행들의 책임도 있다. 과거 국내 산업기반이 취약하던 시절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으며 서민 상대의 영업으로 성장한 은행들이 외환위기가 지난 뒤부터는 ‘중산층을 위한 은행’이 되겠다고 나섰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돈을 떼일 걱정이 없는 곳에 돈을 굴려 편하게 장사하겠다는 속셈이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은행들이 어려울 때 자신을 키워준 서민을 외면하고 부자들만 신경 쓰는 사이에 서민금융이 사각지대로 남았다”고 개탄했다. 제도권 금융에서 밀려난 서민들이 합리적인 조건으로 돈을 융통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금융권(權)’을 보장하려는 조치가 미소금융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성과가 신통치 않다. 미소금융재단이 지난해 12월 출범한 뒤 실제로 대출을 받은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대다수가 큰 기대를 품고 발품을 팔아 재단 사무실을 찾았다가 자격이 안 된다는 통보를 받고 허탈한 심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재기의 의지를 심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정부를 향한 불신만 키우지 않을까 걱정이다.
미소금융이 서민 곁에 자리 잡지 못한 이유는 동아일보가 여러 차례 지적한 것처럼 조건이 너무 까다롭기 때문이다. 10년간의 노숙자 생활을 청산하고 쪽방촌에 거처를 마련한 30대 후반의 장애인 권모 씨가 대출 심사에서 탈락한 사연은 높은 문턱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공사장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며 번 돈을 꼬박꼬박 저축한 그는 작은 트럭을 구입해 채소장사를 해보겠다며 미소금융의 문을 두드렸지만 신용등급이 높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지금까지 빚을 낼 일이 없었으니 당연히 연체기록이 없는 데다 300만 원도 안 되는 저축액을 ‘금융자산’으로 간주해 계산한 탓이다.
미소금융의 본래 취지를 살리려면 이제라도 서민경제의 실태를 정확하게 반영하는 방향으로 개선책을 강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출이 가능한 자격요건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신용등급을 7등급 이하로 못 박을 게 아니라 서류상 등급은 좀 높더라도 현실적으로 은행 대출을 받기 힘든 서민들을 포함시키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연체율을 낮추려면 심사를 까다롭게 할 수밖에 없다는 재단 측의 고충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없는 사람’일수록 빌린 돈을 잘 갚는다는 사실은 금융계에서 널리 통용되는 경험칙이기도 하다. ‘한국판 마이크로 크레디트’라는 간판이 무색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권 씨 같은 이웃에게는 재기할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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