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조경란]설, 가족 그리고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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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6일 03시 00분


명절이나 제사가 돌아오면 나는 대한민국의 여느 노처녀들처럼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피신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것도 잠시, 이제 가족들이 모여도 ‘왜 결혼 안 하느냐’하는 질문조차 하지 않게 된 나이가 되자 그 시간이 슬슬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다 모이면 별의별 일이 벌어지고 그것이 대개는 싸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싸움이라는 것도 내막을 들여다보면 그동안 섭섭했던 감정이 폭발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불가능한 싸움이라고나 할까.

북적거려도 소통 없으면 공허

우리 집 설 풍경은 단출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한 편이다. 여동생 둘이 결혼한 뒤로는 부모와 나, 이렇게 셋이 차례를 모시고 데면데면하게 앉아 떡국을 먹는 걸로 아침이 끝난다. 막내동생은 오후가 되어야 친정인 우리 집으로 오고 한 동생은 도쿄에 살아 자주 못 온다. 저녁 전에 나의 작은아버지들이 잠시 들르는 게 유일한 손님이다.

올 설은 조금 특별했다. 도쿄에 사는 동생과 일본인 제부, 봄이 오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돼 한동안 서울에 못 올 것이 뻔한 조카 둘이 설 전부터 와서 지내게 된 것이다. 근처에 사는 막내동생도 제부가 설 연휴에 출장을 간 탓에 조카들과 우리 집으로 옮겨왔다. 평소의 서너 배쯤 되는 양의 장을 보러 다니면서도 엄마는 신이 난 것 같았다. 절간 같던 집이 아침부터 아이들이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북적거렸다. 설날,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인 풍경은 예전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한 집에 다 모여 있어도 각자 다른 곳에 앉아 있었다. 조카들은 자기들끼리 장난감이 있는 곳에, 엄마는 부엌에, 동생들은 식탁에, 제부들은 작은방에, 작은아버지 가족들은 거실에, 아버지는 텔레비전과 함께 혼자 안방에. 그리고 나는 공연히 이것저것 참견하고 가족들이 뭘 하나 관찰하고 듣다가, 다 같이 모여 앉아 대화하는 짧은 시간이 유일하게 식사 때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늦은 밤까지 조카들이 안 자고 있으면 내가 방에 들어가서 으름장을 놓곤 한다. 그러면 다섯 살짜리 조카가 나에게 ‘큰이모, 우린 지금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고요’, 짐짓 항변한다. 소곤소곤이라는 의성어도 ‘대화’라는 단어도 조카들이 싸울 때나 서로 뭔가 불공평하다고 느끼거나 주장을 할 때 내가 가르친 단어다. 가족들이 다 모였는데도 올 설은 긴 술자리도 크고 작은 말다툼도 없이 지나갔다. 그게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다. 다행인 것은 다툼 끝의 상처가 남지 않아서이고 섭섭하다고 느낀 것은 누구도 솔직하고 시원하게 자신의 이야기나 의견을 말하지 않은 것 같아서이다. 같이 있으되 말하지 않는 것은 같이 있으면서 다투지 않는 것보다 더 좋지 않다.

사회현안도 정성껏 들어야 해결

나는 ‘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은 일찌감치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닌 모양이다. 이 세상에서 친밀한 공존을 느낄 수 있는 단 하나의 공간은 필요하고 거기가 바로 ‘집’이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구성원들과 그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야기’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지 알아야 한다. ‘집’의 확대 개념이 곧 한 나라이고, 한 개인을 가족으로부터 그 나라로부터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의 소중함은 더욱 커진다. 세종시 문제 등 지금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크고 작은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으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정성껏 들으면 들리는 게 마음의 소리다. 정성껏 듣는 것. 그것이 바로 대화의 첫 번째 방법이기도 하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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