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석민]건배사가 전해준 희망 메시지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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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 “진달래!” “변사또!” “오바마!” 연말연시 모임의 새로운 풍속도가 된 건배사들이다. 혹시 “무슨 소리야?” 하는 분을 위해 하나만 소개하면 “당나귀!”는 “당신과 나의 귀한 만남을 위하여”란 뜻이다. 이는 남성 버전이고, 여성 버전은 “당신만 보면 나는 귀찮아”다. 유행하는 건배사 중에는 성적(性的)인 연상을 자아내는 민망한 구호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대세는 탄성과 웃음꽃이 절로 피어나는 기발하고 유쾌한 건배사들이었다. 술자리 문화가 언제 이렇게 진화했을까. 그 함의(含意)는 뭘까.

다수가 어울린 모임이나 술자리는 공(公)과 사(私)가 교차하는 시민사회를 표상한다. 나라님을 조롱하고 국사를 난도질하며 현실에 대한 통찰과 비판력을 키우는 정치학습장이기도 하다. 선진화된다는 건 이런 중간계가 확장되고 충실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실로 지난한 과정이다. 공과 사는 본디 하나이되 음과 양, 혼돈과 질서로 갈라진 태극처럼 쉽게 어우러지지 않는 대립 항이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가 이를 생생히 방증한다.

권위주의가 무겁게 삶을 짓누르던 시절, 권력집단 내에서든 그에 맞선 저항영역에서든 ‘공’의 껍데기를 깨고 ‘사’의 속살을 드러내는 건 무모하고 위험하며 바보스러운 짓이었다. 개인적 소회, 의견, 욕망의 표출은 나약, 불온, 반도덕적이란 낙인과 함께 실질적인 불이익이나 처벌로 이어지곤 했다. 하기에 이는 엄격한 자기검열을 거쳐 금지 내지 변질되었다. 부끄럽고 궁벽한 필자의 대학시절이 그러했다.

‘술자리 구호’의 절제된 미학

몇 권의 책을 읽고 국가, 권력, 자본을 향해 돌을 던지던 어설픈 의식의 시절이었다. 경직된 마음에 일신의 안위나 출세를 위한 준비도 떳떳지 못했다. 멋진 차림새도 안 될 일이었다. 어느 봄날이었다. 스타일리시한 짧은 치마의 여학생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하지만 정작 필자가 내지른 말이라니. “야 골빈당, 팬티 보인다.” 이념과 집단에 휩쓸렸던 시기의 무참한 기억이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흘렀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민주화다. 그 안에 함축된 많은 것 중 하나는 권위주의의 질곡을 벗어나 ‘나’를 회복한 것일 거다. 특히 진보의 시기에 모든 걸 뒤엎듯 역풍이 거셌다. 술자리에서나 접하던 거침없는 언행이 예사가 되기 시작했다. 마치 일상이 술자리가 된 것 같았다.

인터넷이 이 추세에 불을 붙였다. 익명으로 저급하고 충동적인 욕망을 분출하던 과도기를 거쳐 블로그, 셀프카메라, 트위터를 통한 나의 표현은 시대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가장 공적인 소통영역인 방송도 마찬가지다. 톱스타들이 엉뚱한 과업에 좌충우돌, 함께 숙박하며 지지고 볶고, 앞 다투어 서로를 까발리는 각종 예능 내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핵심은 모든 걸 사사화(私事化)하는 것이다. 인간 상호작용 연구의 거장인 고프먼의 말을 빌리면 표면영역과 이면영역의 경계소멸, 좀 더 정확히는 공적세계의 괴멸이다. 과거, 집단에 억눌려 누구도 속을 보이지 않았다면, 이젠 모두가 자기주장뿐 타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소통, 민주주의, 사회통합은 여전히 극심한 위기에 처해 있다.

사적 욕망이 역사의 동력임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 불길이 꺼지는 순간 삶은 생기를 잃고 사회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하지만 욕망이 무절제하게 분출될 때 공동체는 산산이 파열되고 말 것이다. 빤한 얘기지만 공과 사는 섬세한 조절과 균형 속에 동반상승한다. 최다수가 함께 욕망을 충족하는 효율적 경제, 누구도 공을 남용 않는 정의로운 권력, 누구도 사를 억압 않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이때 비로소 만개한다. 서구 정치철학이 꿈꾸어온 유토피아 내지 그 최신 버전인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하버마스) 사회가 이와 다름없다. 공자님 왈,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상태(從心所欲 不踰矩·종심소욕 불유구)”다. 굳이 물질로 환산하면 새 십년이 목표하는 4만 달러 시대쯤 될 터이다.

중간계 소통은 사회통합의 싹

건배사의 함의가 번뜩한 건 이런 상념의 끝자락이었다. 촌철살인의 건배사란 결국 무엇이겠나. 구호가 너무 공적이면 무미건조하다. 그렇다고 조야한 속내를 드러내서야 낯 뜨거울 뿐이다. 그 본질은 공과 사의 절묘한 조화, 절제된 욕망의 미학인 것이다. 세종시인지 행복도시인지로 온 정치권이 신뢰니 강도니 해괴하고 치졸한 싸움에 몇 달을 끌탕질탕 허송하는 사이, 민초들이 어울린 공간엔 진전된 소통, 민주주의, 사회통합의 싹이 움트고 있었던 거다.

이제 최악의 사태를 어설프게라도 미봉하고 음력 새해를 맞이했으니, 필자도 새 희망을 갖고 건배사 한마디 제안할까 한다. 진정한 승자는 관용하는 자다. “마시자(마음을 트고, 시원하게 논의하자, 자∼ 시작)!”

윤석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younsm@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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