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96>집회 결사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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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7일 03시 00분


1907년 보안법 제정
조선인만 적용받아
군중 강제해산 악용

1920년 7월 18일 경성(서울) 단성사에서 열린 일본 동경유학생 순회강연회에 몰린 인파.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0년 7월 18일 경성(서울) 단성사에서 열린 일본 동경유학생 순회강연회에 몰린 인파. 동아일보 자료 사진
《“오후 두시 이십분에 종로경찰서장이 드러와 변사 김도연 군에게 대하야 변사의 강연을 중지한다하매 변사는 의외에 말에 너무 긔가 막힌 듯이 ‘무엇이오’하고 무럿다. …변사는 할 수 업시 의자에 나가 안즈매 느러안젓든 여러 명사와 변사는 일제히 입을 닷치고 잠잣코 안젓는대 경찰서장은 다시 군중에게 대하야 할 말이 잇노라 하고 연단에 나섯다. 분개한 군중은 일시에 박수를 몹시 하야 단성사가 떠나가는 듯이 요란하야 서장의 말을 방해하얏다.”

―동아일보 1920년 7월 19일자》
1920년 7월 18일 일본 동경유학생 학우회가 주최하고 동아일보사가 후원하는 순회강연회가 경성(서울) 단성사에서 열렸다. 일본에서 공부하면서 배운 선진문물을 고향의 동포들에게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열린 전국 순회강연의 첫 행사였다. 강연회는 오후 1시에 시작됐지만 오전 10시부터 군중이 몰려 당시 경성인구가 40만 명이던 시절 청중 수가 3000∼4000명에 이르렀다고 동아일보 기사는 전했다.

오후 1시 순회강연단장이자 도쿄대에 유학 중이던 낭산 김준연(1895∼1971·훗날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 역임)이 단상에 올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와 평등, 평화의 조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고 사자후를 토한다. 두 번째 강사는 게이오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상산 김도연(1894∼1968·초대 재무장관)이었다. 그가 ‘조선산업의 장려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던 중 종로경찰서장이 들어와 강연을 중지시키고 해산을 명했다.

이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7월 19일 기사는 “군중의 얼골에는 일종 형용할 수 없는 처참한 긔운을 띠었고…살긔와 비애가 만장에 가득하얏다”고 전했다. 그 시간 밖에서는 때 아닌 소낙비가 쏟아져 순사에 쫓겨난 어린 학생들의 눈물 젖은 소매는 다시 빗발에 젖었다.

조선통감부는 1907년 7월 27일 보안법을 만들어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봉쇄했다. 이는 일본인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조선인에게만 적용하는 특별법이었는데 일제가 문화통치를 표방한 1919년 3·1운동 이후에도 유지됐다.

이날 순회강연회가 강제 해산된 뒤 동아일보는 22일 1면 사설에서 “무차별이니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선정덕정(善政德政)이니 하는 사(蛇·뱀)의 설(舌·혀)을 농(弄)하야 조선인을 기만치 말라”고 조선총독부를 규탄했다. 1922년 1월 15일 1면 사설 ‘정치적 집회를 허(許)하라―민중에 대한 모욕’에서 조선민중의 정치적 집회금지는 목장에 짐승을 가두는 것과 같다며 맹비판을 가했다.

일제는 이런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고 보안법을 개정하지 않았다. 보안법의 개정을 촉구한 1931년 9월 10일 동아일보 1면 사설은 1930년 한 해 조선에서 열린 집회 5490건 중 1054건이 금지처분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 사설이 ‘인민의 기본적 자유’로 규정한 집회결사의 자유는 1948년 제헌헌법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으로 규정됐다. 보안법이 제정된 1907년으로부터 40년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 하지만 그것이 실질적 권리로 확립되는 데는 다시 4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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