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97>신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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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18일 03시 00분


고종 도로정비 계획
일제 식민통치 이후
수탈편의 위주 재편

1904년까지 진행된 고종의 서울도시개조사업으로 넓어진 동대문 근처 종로길. 사진 제공 태학사
1904년까지 진행된 고종의 서울도시개조사업으로 넓어진 동대문 근처 종로길. 사진 제공 태학사
《“경성의 도로는 해마다 일부분식 새 길을 내이며 또는 전에 잇는 길을 널게 확장하야 몃해 후에는 대경성의 시가를 이루울 터인바 경성부의 금년 예산에 편입한 새 도로의 사용할 총예산은 육만삼백이십팔원이오. 그 금액으로 새 도로를 내일 처소는 광화문통에서 견지동 큰길로 통하는 도로의 일부를 비롯하여 여섯 처소의 도로를 금년도 예산으로 차례를 따라서 공사를 시작할 예뎡인 바….”―동아일보 1921년 9월 6일자》

근대의 풍경은 넓어지거나 새로 만들어진 신작로의 풍경이었다. 구한말 지식인들도 도로가 나라의 부강과 직결된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이후 일제에 나라를 빼앗겨 도로를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고종은 대한제국 때 수도의 도로를 침범한 집이나 창고를 걷어내 길을 넓히는 작업으로 도시개조사업을 시작했다. 또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모델로 현재의 서울 시청 앞의 도로를 방사형으로 정비했다. 1899년 음력 4월에는 서울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처음 전차를 운행시키면서 근대적인 교통망 확충에도 애를 썼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통치로 자발적인 도로 정비 기회는 박탈당한다.

일제가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가장 우선한 사업 중 하나가 도로 개수 사업이었다. 일제에 의해 도로가 정비되면서 국토의 균형발전이 아니라 수탈 편의 위주의 정비가 시작된 것이다. 일제는 주로 내륙과 항구를 연결하고, 농산물이 풍부한 지방도를 개수해 침략과 수탈의 수단으로 삼았다. 1906년 3월 일제는 7개년 계속사업으로 전국의 주요 도로를 개수하는 전국 도로 개수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4월에는 치도국을 별도로 만들어 도로관리 업무를 전담케 했다.

이 시기에 개수·신설된 도로를 당시에 ‘신작로(新作路)’라 불렸다. 신작로는 조선 정조 때 서울과 수원 화성을 오가는 길을 넓히며 붙인 이름이지만, 우리 인식 속에 일제의 산물로 남아 있는 것은 당시의 대대적인 도로 정비 작업 때문이다.

일제는 1907년에 시작된 제1기 사업으로 진남포∼평양, 목포∼광주, 전주∼군산, 대구∼포항간 4개 노선 255.9km를 정비했다. 일제는 도로개수사업으로 지역간 교통을 원활히 하고 철도사업을 병행하면서 반일적인 민심수습 효과도 기대했다. 당시 대구∼포항, 목포∼광주 구간은 폭 6m, 군산∼전주, 진남포∼평양 간은 폭 7m로 시공했다. 전 노선에는 가로수를 심었다. 2기 사업은 1908년에 시작됐는데 수원∼이천 간 등 7개 구간 총 197.7km가 그 대상이었다.

1911년 4월 일제는 도로규칙 공포를 통해 한반도를 원료공급지와 상품 소비시장으로 바꾸기 위한 신작로 건설을 멈추지 않는다. 도로의 종별, 관리 및 비용 부담에 관한 11개 조로 된 규정이었다. 근대의 신문에 자주 등장하는 1등, 2등, 3등, 등외도로를 비롯한 4종 도로 구분이 이때 이뤄졌다. 1등 도로는 도청 소재지뿐만 아니라 사단사령부 등 군사상 전략 도로였다.

이후 도심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신작로가 뚫렸다. 1921년 7월 25일 동아일보에는 ‘서대문동에 고색이 창연하게 서 잇든 ‘영성문’(경희궁 출입문)이 헐리기는 작년 여름의 일이다. 지금은 그 영성문 자리로부터 남편으로 정동까지 탄탄한 신작로가 새로 뚫려 잇다’고 전하고 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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