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새터민이 한국에 정착해서 겪는 어려움 중 하나를 말해보라고 하면 누구나 언어라고 대답한다. 남한 사람들은 영어를 너무 많이 써서 못 알아듣겠다는 얘기다. 이들의 말처럼 우리가 정말 영어를 많이 쓰는가? 나의 판단으로는 아니다. 못쓴다는 쪽이 맞는 표현이다. 온전하게 영어 한 문장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다만 낱개로 배운 영어 단어를 비빔밥처럼 섞어서 쓸 뿐이다.
토막난 영어써야 말 통하는 사회
앙드레 김이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화∼안타스틱하고 에∼엘레강스하고’라고 말한 이래(그러나 앙드레 김은 통문장 영어에도 능하다) 우리나라는 바야흐로 ‘낱개영어’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언어의 융복합화(?)가 이루어진 셈이다.
어느 기업의 회의석상에서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그 프로젝트는 상당히 델리커트한 문제라서 난 인발브되기 싫고….’ 이 정도는 그래도 약과다. ‘이번 프로젝트의 큰 프로블럼은 팀의 하모니가 부족해서야. 처음부터 미스매치였어. 볼륨도 작은 미션인 듯싶은데. 모두의 시니컬한 마인드에 난 쇼킹했어. 석세스를 위해 좀 더 두 베스트했어야 했는데….’ 이 지경까지 가서는 가히 우리말의 실종사태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원인이 무엇일까.
사실 우리나라 말의 대부분은 한자어가 뿌리다. 영어와 프랑스어 등 서구의 언어의 뿌리가 제국 로마의 언어인 라틴어이듯이 한자를 모르면 한국말의 진미를 음미하기 어렵다. 그만큼 중화권의 영향이 크다. 때로는 대륙에 어쩔 수 없이 사대했던 신라 고려 조선시대 이래로 형성되고 만들어진 우리말에 한자어가 무수히 가미된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사자성어가 전하는 의미도 단지 중국고사의 유래일 뿐이지만 교수신문 같은 한국의 식자사회에서는 특히 이 사자성어를 애용한다. 독보적으로 유식해 보이기 때문이다. 춘향전에서 거지로 분장한 이몽룡의 문자(한자)씀을 보고 ‘그 양반 문자속이 기특하오’라고 아이가 부러워하는 대목 속에 이 한국인의 언어사대주의적 풍속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돋보이고 싶어 하는 식자사회의 우월의식은 중국의 것은 무조건 커보였던 사대적 습성과 묘하게 뒤섞였다. 무의식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언어사대의 대상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바뀌며 우리말 또한 재빠르게 변신했다. 그리하여 글로벌이라는 미명하에 한국어는 지금 또 한번 조각보 신세를 면치 못한다.
시골 복덕방 간판도 ‘××컨설팅’
거리의 간판은 좀 세련되게 보이려고 하면 영어로 써야 한다. 열쇠 파는 집에도 요즘 열쇠라는 말 대신 ‘키’라는 말을 쓴다. 아주 외진 시골 복덕방의 간판도 ‘○○컨설팅’해야 그럴듯해 보인다. 국가정책입안자도 로드맵 어젠다 정책 마인드 같은 단어를 써야 미래지향적으로 포장된다. 젊은이는 한술 더 떠서 ‘에지 있다’ 등 신조어를 만들어 쓴다. 리얼하다(사실적이다) 초이스(선택) 콘택트(접촉) 어프로치(접근) 등 분명한 우리말이 있는데도 일상 속에 버무려 쓰는 말은 부지기수다. 나의 친구는 최종 결정이라는 말을 버리고 파이널 디시즌을 고집한다.
영어를 통문장으로 써야 할 때는 모두 입을 닫아버리는 사람들이 낱개영어에는 능한 입놀림을 보이는데 그래야 세계화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으로 남에게 비치기 때문이다.
광복 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현대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이 중국의 고사성어가 아닌 낱개 영어를 혀 꼬부려가며 쓰기 시작한 이래 한국 지식사회의 유행은 어느덧 시골 구석구석까지 번져 제대로 된 한국어 간판은 시골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영어인지 한국어인지 모를 국적불명의 대형 원색 간판이 시골 사는 순박하기 그지없는 사람의 기만 죽인다.
어느 시골의 지방자치단체는 비싼 용역비를 지급하고 대로 한가운데 큰 현판을 마련했다. 이름 하여 ‘U 크리에이티브 시티, ○○’이란다. 유비쿼터스와 어우러진 창조 도시라는 자부심을 표현했지만 노인인구가 상당수인 이곳 주민은 “저게 뭔소리여”라며 고개만 갸우뚱한다.
기업의 업무회의에서뿐 아니다. 대학은 낱개영어의 가장 큰 시장이다. 물론 학술적 전문용어는 토착화가 필요하지만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분명한 우리말 낱말까지 영어와 비벼야 학문이 되는 교육풍토 또한 한글오염의 주범이다. 차라리 영어강의를 하지 못할 바에는 우리말이라도 제대로 쓰는 일이 시급하다.
올 1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서 스티브 잡스 다음으로 세계 최고실적을 낸 경영인 2위로 뽑힌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영어를 써야 할 회의석상이 아닌 모임에서는 절대 낱개로 비빈 영어를 쓰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변소 좀 다녀오겠습니다.’ 레스트룸도 아니고 화장실도 아닌 친숙한 우리말, 변소를 고수하는 그 특유의 언어적 고집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적 경영인으로 우뚝 서게 만든 이유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정체성을 왜곡한 ‘글로벌’이란 단지 사상누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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