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99>종로 vs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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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0일 03시 00분


종로 상인 위상 높아
日, 도로폭 좁혀 압박
명동엔 日상인 많아

1910년경 서울 종로(왼쪽)와 명동의 거리 풍경.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10년경 서울 종로(왼쪽)와 명동의 거리 풍경. 동아일보 자료 사진
《“종로 부근 상Z 주인에 대하야 경찰서에서 호츌하야다가 무단히 상Z을 다치고(닫고) 경찰관이 명령을 하야도 개Z을 아니한 것은 불온한 행동이라고… 대부분은 모도 삼일간 검속을 한다 하고 류치장에 구류하엿는대 종로와 광교 부근의 삼백오십 명 상Z 주인은 대개 이 디경을 당하얏스며 류치장이 조바서 일시에 구류를 할 수가 업슴으로 차레를 뎡하야 검속을 행할 방침이라더라.”

―동아일보 1920년 8월 27일자》
조선의 모든 길은 종로로 통했다. 나라를 처음 열면서 도읍의 동서를 가로 잇는 대동맥으로 만든 길. 1919년 3월 1일 국권을 되찾자는 “독립 만세” 선창이 종로 한복판 탑골공원에서 터져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듬해 8월 미국 의원단의 경성 방문을 계기로 다시 산발적인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경찰은 이날 가게를 닫은 조선 상인을 모두 검거했다. 이 땅에서 종로 상권(商圈)이 가졌던 위상과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3·1운동 당시 종로 상인들은 “일체 폐점하고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할 것. 약속을 어기면 용서 없이 응징할 것”이라는 내용의 ‘경성 상민 일동 공약서’를 냈다. 일제는 ‘혼마치(本町)’로 불렸던 충무로와 명동 일대에 모여든 일본 상인들을 지원해 종로를 억눌렀다. 종로는 여섯 마디로 분할해 일본식 행정구역 단위인 ‘초메(町目)’를 붙였다. 그 자취가 지금의 종로 1∼6가다. 1921년부터는 길의 폭을 좁혀 상행위를 압박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22년 10월 24일 ‘종로통길 좌우에 하수도를 내어’라는 기사에서 “금년 여름부터 시내 청계쳔에서 파내인 모래와 흙을 종로 사뎡목부터 종로 네거리까지 큰길에 펴놋코 요사이는 또다시 광화문통까지 산떼미가치 날마다 펴놋는 까닭에 통행하는 사람의 발목이 빠저서 단일 수 업는 것을 물론이어니와 길가의 상Z들은 집안으로 물이 흘너 드러와서 적지 아니한 곤난을 당한다”고 전했다.

임권택 감독의 1990년 영화 ‘장군의 아들’은 일본 야쿠자에 맞서 종로 상인들을 보호하는 건달 김두한의 모습을 그렸다. 1930년대 일본 건축가의 설계로 지어진 혼마치 미쓰코시(三越) 경성지점과 한국 건축가가 설계한 종로 화신백화점의 경쟁 구도는 두 상권 대립의 축약판이었다. 혼마치는 러시아, 터키, 이탈리아, 영국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가 생길 정도로 번성했다. 반면 러시아인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가 ‘코레야 1903년 가을’이라는 글에 “경성에서 가장 좋은 상점과 시장이 있다”고 회고한 종로는 갈수록 위축됐다. 조선 제일 상가의 지위를 혼마치에 넘겨주고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한 상가로 전락해간 것이다.

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는 “옛 종로는 이 땅에 살던 무지렁이들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커다란 그릇 같은 공간이었다”고 했다. 명패만 남은 피맛골, 1987년 철거된 화신백화점 자리에 미국 건축가의 설계로 세운 종로타워, 80년 넘도록 자리를 지킨 미쓰코시 경성지점(현 신세계백화점 본관)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종로와 명동 길의 모습은 역사의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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