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유럽에서 세계 100대 도시를 소개하는 책자를 본 적이 있었다. 호기심에 서울을 찾았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교토도 있고 중국 베이징, 태국 방콕 등 여러 도시가 있었으나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의 수도인 서울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주 인도 뭄바이에서 세계초고층학회 학술대회가 있었다. 주제 발표 내용에 영국 런던, 호주 시드니, 중국 상하이 등 세계 여러 도시가 등장했으나 서울은 여전히 없었다.
학연 얽힌 설계심사와 최저가 낙찰
최근 서울은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펼침으로써 변모를 시도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미국의 어느 유력 신문이 서울을 가장 방문해 보고 싶은 도시 31개 중에서 3번째로 꼽기도 했다. 아주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평가에 동의할 정도로 서울이 바뀌었는가?
도시를 구성하는 중심에는 건물이 있다. 세계 어느 도시든 아름다운 건축물이 도시의 이미지이고 얼굴이다. 도시에는 공원과 가로수 등의 자연환경이 그 뒤를 받치고 있다.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파리의 에펠탑, 빌바오(스페인)의 구겐하임 미술관,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 상하이의 진마오 타워가 모두 도시의 얼굴이다. 이제 곧 싱가포르에는 마리나베이샌즈라는 창의성 넘치는 새로운 호텔이 도시의 상징물로 등장할 것이다. 국내 도시에는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는 건축물이 왜 없을까? 조명이 약해서, 아니면 간판이 지저분해서인가? 근본적인 문제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베이징에 2008년 등장한 CCTV 사옥과 새둥지 올림픽 주경기장, 그리고 국가대극원(오페라하우스·음악당)을 보자. 우선 규모 면에서 중국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중국의 경제가 성장했다고 하지만 이보다는 중국을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의 스케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공공건물을 통해 베이징은 새로운 문화도시로서 커다란 주목을 받고 있다. 반면에 서울역 KTX 역사를 비교해 보자. 한국의 고속철도는 세계에 몇 개 되지 않는 자랑스러운 철도가 아닌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비가 새지 않는 정도의 모습이다.
건축 관련 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현행 설계심사제도는 어떠한가? 학연과 로비를 중심으로 하는 인적관계의 뿌리가 너무 두텁다. 아마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도 우리 풍토에서는 선정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학연에 의한 심사, 전관예우를 위한 심사제도가 개선되지 않으면 참신한 작가의 좋은 작품은 등장하기 어렵다.
우리 건축을 멍들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최저가 낙찰제이다. 아주 이상적이고 경제적 제도인 듯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수주 경쟁은 실력(기술)보다 가격(덤핑)에 의해서 결정된다. 덤핑으로 수주한 공사에서 이익을 남겨야 하니, 부품업체를 쥐어짜는 도요타자동차와 같이 멍이 커져만 갈 것이다. 값싸게 지으려는 제도가 공사품질의 저하, 건축문화 발전의 장애, 대학교육의 질적 저하로 이어진다.
국가 브랜드 위한 투자로 접근해야
국내 도시에 문화유산으로서 그리고 국가의 이미지를 높여주는 좋은 건축 작품을 남기려면 근본적인 문제점을 보아야 한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비전과 스케일이 있어야 하고, 설계비가 비싸다고 해외 저명 건축가의 작품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공정을 가장한 불공정한 심사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좋은 작품을 구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좋은 품질의 공사를 보장할 이익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실적 위주의 출혈경쟁을 시켜서는 안 된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는 이 정도 문제로 신음하지 않는다. 국가경영의 기본적인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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