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三代가 함께 뛴 밴쿠버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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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8일 20시 00분


겨울올림픽은 부국(富國)들의 잔치다. 밴쿠버 올림픽의 시상대에서는 아프리카, 중남미, 일본 중국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의 국기를 구경하기 어렵다. 기후가 더운 나라는 그렇다 치더라도 눈이 많이 오는 나라 중에도 겨울 스포츠의 불모지가 많다. 가난하고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나라들이다.

1964, 1968년 겨울올림픽에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로 참가했던 김귀진 선수(65)는 국내에 빙상장이 없어 얼음이 언 논밭에서 연습을 했고 공식경기는 한강 다리 밑에서 열렸다고 회고했다. 두 대회에서 한국은 모두 노메달이었다. 논바닥과 강에서 얼음을 지친 선수들에게 겨울올림픽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우리가 겨울올림픽에서 첫 메달을 딴 것은 서울 올림픽을 치른 지 4년 후인 1992년이었다. 경제 발전을 바탕으로 국제 수준의 겨울스포츠 선수를 양성하기까지는 20여 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밴쿠버에서 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은 서울 올림픽 이후인 1988∼1990년생이 주류이다. 이들은 한국의 경제발전 덕에 국제 기준에 손색이 없는 빙상장에서 연습을 하고 초등학교 때 미국 콜로라도로 전지훈련을 다니며 기량을 닦았다.

논바닥 선수에서 피겨 여왕까지

밴쿠버에서 벌어진 한국의 메달 잔치는 식민지 세대에서 전후의 베이비 부머 세대로, 그리고 서울 올림픽둥이로 이어지는 삼대발복(三代發福)의 산물이다. 2관왕 이정수의 아버지(49), 김연아의 어머니(51), 이승훈의 아버지(52), 모태범의 아버지(51), 이상화의 어머니(50)는 모두 50 전후다. 대부분 1955∼1963년에 태어난 베이비 부머다.

식민지에서 태어난 세대들이 청·장년기에 6·25전쟁을 겪고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와선 베이비 부머 세대를 낳았다. 갑자기 학령인구가 불어나 초등학교에서는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2부제 수업이 실시됐다. 입학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중학교 무시험, 고교 평준화 같은 입시제도의 변화가 몰아쳤다. 식민지 세대의 한 맺힌 교육열은 한국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식민지 세대는 자녀가 운동을 하면 “왜 공부를 안 하고 빌어먹기 딱 좋은 운동을 하느냐”고 잔소리를 했다. 그러나 베이비 부머들은 서울 올림픽을 지켜보면서 시야가 넓어졌다. 운동 하나만 잘해도 부를 쌓고 국가와 개인의 명예를 높일 수 있음을 배웠다.

보릿고개를 겪은 세대에게는 가난과 굶주림으로부터의 자유가 가장 절실한 삶의 과제였다. 식민지 세대에게 등 다습고 배불리 먹는 것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베이비 부머들은 아버지 세대보다는 배고픔을 덜 겪었다. 학교에 가면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물자인 옥수수 가루와 분유라도 먹을 수 있었다. 쌀밥을 못 먹는 집에서는 고구마라도 먹었다. 세 끼 밥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진 베이비 부머들은 더 높은 단계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로 나아갔다.

서울 올림픽둥이 세대는 앞선 세대의 희생으로 쌓아올린 배고픔의 해소, 국가와 사회의 안전, 국가에 대한 소속감과 자부심의 바탕 위에서 가장 수준이 높은 자아실현의 단계로 올라섰다. 밴쿠버의 올림픽둥이들은 과거 세대의 메달리스트들과 달리 “조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으로 이어지던 거창한 소감을 말하지 않는다. 김연아는 금메달을 목에 걸고 “선수로서 이루고 싶었던 꿈을 해냈다”고 말했다. 이승훈은 “결과와 관계없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며 기뻐했다.

피겨스케이팅은 스포츠와 예술의 합성이다.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팅에는 개인의 성취를 뛰어넘어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의미가 함축돼 있다. 프리스케이팅 하루 전인 25일 만난 일본 신문의 서울특파원은 “모든 기량에서 김연아가 아사다 마오보다 한 수 위”라며 김연아의 우승을 예측했다. 그는 다음 날 “일본은 밴쿠버에서 지금까지 금메달이 하나도 없다. 아사다는 거의 유일하게 금메달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선수였다”라고 아쉬움을 표시했다. 올해는 조선왕조가 일제에 치욕적으로 국권을 상실한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해다. 김연아의 금메달은 한일관계 100년사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

금메달 없는 일본 압도한 한국

한국은 메달 집계 순위로 캐나다 독일 미국 등에 이어 당당히 5위이다. 일본은 20위다. 금메달이 없는 일본은 어제 스피드스케이팅 팀 추월 여자결승에서 사력을 다했지만 0.02초 차로 마지막 금메달의 꿈이 날아갔다. 잘나가던 일본이 요즘 왜 이러나 싶다. 브라질 스페인 인도 멕시코 터키 같은 대국은 밴쿠버에서 메달이 하나도 없다. 식민지와 전쟁을 극복하고 살아남은 세대들이 좌절하지 않고 산업화 민주화를 달성하고 희망의 씨앗을 뿌렸기에 밴쿠버의 환희가 가능했다. 한국 선수들의 겨울올림픽 메달에는 삼대의 염원이 서려 있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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