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국악과 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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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일 03시 00분


허영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지난해 창덕궁 연경당에서 ‘진작례(進爵禮·왕실 경축 행사 때 신하가 임금에게 예를 올리는 의식)’를 복원했다. 허 교수는 3년의 연구를 거쳐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한 차례씩 궁중의 행사용 춤과 노래인 정재(呈才)를 의상 무용 음악 음식에 걸쳐 원형에 가깝게 되살렸다.

이 진작례는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1828년 음력 6월 순조와 순원왕후의 탄신을 경하하기 위해 거행했던 의식이다. 진작의궤에 진행 과정이 세세히 기록돼 있어 선인의 기록 문화도 엿볼 수 있다. 허 교수는 “연경당 진작례는 왕에 대한 찬사를 넘어 궁중 예술의 진수를 담은 걸작 중 걸작”이라며 “왕실 문화 상품으로 해외 사절에 보여주기에도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윤영달 크라운·해태 회장은 전통예술의 명인들이 대거 출연하는 ‘대보름 명인전’을 3년째 마련했다. 지난달 27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린 3회 행사에는 안숙선(판소리) 박용호(대금) 양연섭(가야금) 이태백(아쟁) 홍종진(대금) 등 16명의 명인이 출연했다. 가야금독주 ‘달하 노피곰’(가야금 민의식, 장구 김정수), 한량무(임이조), 피리독주 ‘상령산’(정재국), 해금독주 ‘비’(정수년), 태평무(양성옥), 경기민요 ‘창부타령’(이춘희) 등을 통해 우리 문화의 품격과 절제미를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윤 회장은 2006년 국내 첫 민간 국악단인 ‘락음(樂音) 국악단’도 창단해 운영하고 있다.

윤 회장은 기자에게 “문화 마케팅으로 시작했지만 수천 년 동안 한민족의 DNA 속에 각인된 국악은 우리 고객들의 감성을 일깨우고 소통할 수 있는 문화”라며 “국악은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기 때문에 글로벌 시장에서도 잠재력 있는 콘텐츠”라고 말했다. 윤 회장은 1995년경 경영이 어려울 때 단소의 단아한 소리에 매료돼 연주를 배우면서 잡념을 물리치고 마음을 다스렸다고 한다.

젊은 국악인들도 막힘없는 상상력으로 국악의 미래를 가다듬고 있다. 대금연주자 겸 작곡가 차승민 씨는 국악과 시를 접목시키는 프로젝트 그룹 ‘시로(詩路)’를 이끌고 있다. 올해 초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상식 축하 무대에 조선의 시인 임제의 ‘무어별(無語別·말없는 이별)’과 류시화의 ‘여섯 줄의 시’를 소재로 한 작품을 내놓으면서 국악의 새로운 길을 선보였다. 차 씨는 “선후배 국악인들이 현대음악과의 퓨전, 장르 간 크로스오버를 시도하면서 국악이 고루하다는 편견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경계를 넘어서는 퓨전 국악인들도 즐비하다. 창단 10년을 맞은 ‘타루’, 국악계의 소녀시대로 불리는 그룹 ‘미지’를 비롯해 ‘아리수’ ‘프로젝트 락’ ‘팔색조’ ‘불세출’ 등이 그들이다. 특히 ‘파격 국악’의 대선배격인 그룹 ‘슬기둥’은 최근 창단 25주년 공연을 성황리에 끝냈다.

국악의 요즘 추임새가 이렇다. 양악(洋樂)의 과잉에 잘 보이지 않지만, 여기저기에서 국악의 울림을 들을 수 있다. 기자에게는 그 흐름이 조만간 커다란 물줄기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양악을 더는 새롭게 보기 어려운데다, 우리 전통의 원형을 확산시키려는 이들과 양악과의 접목을 통해 국악의 가치를 새로 제시하는 이들이 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계 속에서 당당한 젊은 세대도 우리 것에서 남다른 취향을 찾기 시작했다. 세계와의 소통도 우리의 정신 언어로 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91년 전 오늘 ‘민족 자결의 정신’을 문화로 이어받는 길이다.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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