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나라당 의원총회는 갈라서기로 작정한 부부의 마지막 싸움을 연상시켰다. 친이(친이명박)-친박(친박근혜) 편싸움은 시댁과 친정의 일가친척까지 나서 갈등을 부채질하는 막장 드라마 같았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갈등은 ‘화성남’과 ‘금성녀’라는 남녀 차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지도자 이미지 전문가인 황상민 연세대 교수(심리학)는 “박 전 대표가 여성 정치인이라는 것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 것이 사실”이라며 “이 대통령은 여린 성격이고 여성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면서 일에 매달리는 성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지금 박 전 대표에게 뚜렷이 나타나는 이미지는 ‘권력이 있고, 대통령이 뭘 하려면 재가가 필요한 존재’로서의 여왕 이미지”라고 말했다.
1998년 초선 의원 시절 박 전 대표의 이미지는 양갓집 규수나 공주, 소설 토지의 여주인공 서희 쪽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벼랑 끝에 내몰린 한나라당의 대표로 2004년 4월 총선에서 121명을 당선시키고 4차례 재·보선을 완승으로 이끌면서 그는 ‘여왕’이 됐다. 이 대통령과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그의 여왕 이미지는 변하기 시작했다.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을 위해 자신이 가장 잘한 일 가운데 하나로 의원총회 개혁을 꼽는다. 그는 당 대표가 단상에 앉아 진행하던 의총의 단상에서 대표 의자를 치우고 의원들 사이에 내려가 앉았다. 그랬더니 권위적인 분위기와 함께 의원들이 자기 생각을 밝히길 꺼리던 분위기도 사라졌다고 했다.
실제로 그의 대표 시절 한나라당의 많은 중요한 결정이 의총에서 이뤄졌다.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당론 결정 때는 의총에서 12시간 동안 끝장토론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국보법 핵심 조항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자 의원 투표로 대표에게 모든 것을 일임했고 결국 국보법을 지켜냈다. 행정도시법, 사학법 장외투쟁 때도 의총에서 격렬하게 토론했다. 박 전 대표는 회고록에서 “의총장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도장이 됐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세종시 수정안이 발표되기 전에 미리 “수정안이 당론으로 채택돼도 반대한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는 친박 이계진 의원의 ‘무기명 투표’ 제안을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면 된다”고 일축했고, 친박 좌장 김무성 의원의 절충안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내쳤다. 그러니 친박 의원들이 의총에서 ‘세종시 원안 사수’를 합창한 것은 당연했다. 의총 개혁을 자랑하던 박 전 대표가 의총 분위기를 그렇게 만든 것은 자기부정이 아닐 수 없다. 의총은 박 전 대표 비판자들이 독선적인 여왕 이미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불확실한 미래권력이 저 정도면 현실권력이 됐을 때 누가 감히 비판하고 직언할 수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이 늘 수밖에 없다.
박 전 대표가 신뢰와 신념을 최고 덕목으로 여기는 걸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는 ‘나의 사전에 약속을 깨는 일은 없다’ ‘왕따가 되더라도 신념을 지키겠다’고 한 사람이다. 다만 자신의 소신과 신념이 중요하다면 자신을 따르는 친박 의원들에게 ‘각자 소신대로 하라’고 풀어줘야 한다. 그게 민주적 지도자가 취할 올바른 자세다.
박 전 대표는 자신이 일으켜 세운 한나라당이 다시 위기에 처한 데 이 대통령과 공동책임이 있다. 자신이 살린 가문의 완고하고 독선적인 마님이나 여왕보다 분란을 해결하는 지혜로운 어른의 이미지로 변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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