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동 칼럼]판사 품격이 사법부의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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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2일 03시 00분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역사적 과업을 이룩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가 미성숙한 단계에 있음을 직시해야만 한다. 건강한 민주사회의 구심력이 되는 권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를 타파했다고 평가받지만 그가 훌륭한 정치 지도자의 위엄과 권위를 스스로 파괴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념적인 갈등 때문인지는 몰라도 민주주의 사회의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의 권위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다. 문제의 심각성은 사법부의 권위가 국민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 법을 집행하는 일부 판사에 의해 실추된다는 점이다. 재판을 받는 사람이 사법부의 권위 상실로 재판의 결과를 믿지 않으면 과연 어떻게 될까.

그동안 판사들은 식민지 시대의 의식구조를 물려받아 사회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는 것을 당연시해 왔다. 물론 그들은 사회의 가장 엘리트 집단이었고 또 훌륭한 법관으로서 사명감을 갖고 충실히 일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일부 젊은 법관은 권력 지상주의 시대는 가고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지식사회 시대가 왔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국민 위에 군림하는 자세를 보여 여론의 질타를 받는다.

어떤 판사가 오만과 편견을 갖고 재판에 임해 올바른 판결을 할 수 있을까. ‘윤리는 법 위에 있다’는 게오르크 옐리네크의 말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신성한 재판정에서 아버지뻘 되는 68세 노인에게 버릇없다고 꾸짖는 39세 판사가 있고, 부도가 나서 초췌해진 피고인에게 얼굴 때깔 좋다고 말하는 판사가 있다면 재판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재판은 죄를 심판하는 일이지 사람을 심판하는 일은 아니다. 효봉 스님이 자신의 잘못된 재판의 결과로 살인을 초래했다고 참회하며 불가(佛家)에 귀의해서 승려로서 입적한 일은 재판에 임하는 젊은 판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믿는다.

납득못할 판결-자세에 권위 실추


이것뿐만 아니다. 재판은 법률의 해석에 따라 이뤄져도 판사가 재판정에서 편향된 이념에 경도되어 양심이란 이름으로 상식과 사회적인 통념에 어긋나는 독단적인 자세를 보이면 사법부의 신뢰를 잃게 만들 뿐만 아니라 헌법에 기초한 나라의 기틀을 흔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우드로 윌슨 전 미국 대통령은 “법은 사회의 관습과 사상의 결정체이고… 그 법은 모든 피통치자의 동의에 근거를 두고 있고 인류의 조직화된 여론에 의해 뒷받침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엘버트 허버드 역시 “여론을 구현시키지 못한 법은 절대 집행되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론은 결코 일시적으로 분출된 분노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보이지 않게 쌓여서 형성된 이성적인 사회 심리가 객관화된 현실이다.

국민이 존경하는 이상적인 판사는 어떤 자세를 가진 사람인가. 어느 누구와 대화를 하더라도 독단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변증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문제에 대해 해답을 구했어도 그것과 똑같이 진실된 또 다른 답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처지에서가 아니라 상대편의 처지에서 문제를 이해하려는 마음 자세를 보이는 사람이다.

그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의 탐욕을 제어할 수 있는 명판결을 내린 재판관 포샤처럼 ‘번쩍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닌 것’을 발견할 만큼 사물을 있는 그대로는 물론이고 다각도로 볼 수 있는 밝은 눈과 지혜를 가진 판사일 것이다. 더 나아가 간단한 사건에 대해서는 법률적 해석을 정확히 내리지만 이삭을 신에게 바쳐야만 했던 아브라함처럼 더욱 크고 복잡한 문제에 부닥쳤을 때는 궁극적인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없어 밤을 새워 고민할 줄 아는 판사다.

또 그는 한 치의 자만심도 없이 정중한 매너로서 상대편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상대편의 좋은 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과 그것으로 인해 오는 고통을 이해해 주는 것이 곧 성공적인 판결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 방편이 되고 죄를 지은 사람을 나락으로부터 구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품격과 소양 키우는 것이 해결책

사법부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풍부한 재판 경험과 탁월한 법률지식, 인문학적 소양은 물론이고 다양한 지식을 폭넓게 가진 품격 있는 재판관이 적재적소에서 지금보다 많이 일해야만 되지 않을까.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마셨던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재판관은 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펠릭스 프랭크퍼터도 재판관은 “역사가와 철학가와 예언자에게 요구되는 기능을 고루 합쳐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제19대 미 연방 대법원장을 지낸 대법관 윌리엄 렌퀴스트가 미국 정치사에 남을 역사적 사건 심리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도 덕과 박학다식을 겸비한 높은 인품에서 오는 권위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이태동 문학평론가·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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