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오영근]22년째 잠든 의료분쟁 관련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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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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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집 마당에서 넘어져 의식을 잃은 환자가 병원으로 실려 왔다. 수술을 받은 환자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인공호흡장치를 부착하고 치료를 받으며 상태가 호전됐다. 며칠 후 환자 부인은 치료비를 부담하기 어려운 데다 사업 실패 후 17년 동안 술만 마시고 가족을 구타했던 환자가 회복되어 가족을 다시 괴롭힐까 걱정됐다. 그녀는 차라리 환자가 회복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환자를 퇴원시켜 주도록 의사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의사는 환자가 사망할지도 모른다며 퇴원을 극구 만류했다. 그녀는 퇴원을 고집했고 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의사는 퇴원 후 환자가 사망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고 퇴원시켰다. 환자는 인공호흡보조장치를 제거하고 떠난 후 5분도 안 돼 사망했다.

1997년에 발생한 B병원 사건의 내용이다. 2004년에야 종결된 형사재판에서 수련의를 제외하고 환자 부인은 살인죄, 담당 과장과 전문의는 살인방조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에서 환자 부인과 의사에게도 잘못이 있지만 가장 큰 잘못이 있는 사람은 법률가이다. 환자와 의사가 의지할 수 있는 법과 제도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만들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자의 치료비를 걱정하지 않았다면 부인이 퇴원을 고집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의사도 퇴원불허 조치 이후 발생할 책임문제를 걱정하지 않았다면 환자의 사망을 예상하면서도 퇴원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특히 환자 부인에게 치료비가 없으면 환자의 상태가 회복된 후 도망가라고까지 조언했던 의사는 법제도의 공백에 따른 피해자이기도 하다.

의료사고가 발생할 경우 피해자가 가장 원하는 것은 원인을 알고 만약 의료인에게 과실이 있었다면 의료인의 솔직한 사과와 충분한 배상을 받는 일이다. 그러나 의료분쟁을 신속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할 법제도는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 의료인이 내심으로는 과실을 인정해도 이를 시인해서는 안 되는 형편이다. 이런 의료인의 태도에 분노한 피해자는 병원을 점거, 농성하는 불법행위를 하기도 한다. 소송으로 해결하는 길이 있지만 너무나 오랜 시일이 걸리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따라서 의료사고로 인한 분쟁을 합리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 이를 위해 1988년 이래 여러 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됐으나 2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입법화되지 못했다. 국회에 계류된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안’은 의료사고 피해자가 신속하고 충분한 배상을 받도록 하기 위한 분쟁조정제도, 손해배상금 대불제도와 교통사고에서와 유사한 형사처벌의 특례를 규정하고 있다.

자동차 운전행위나 의료행위 모두 위험한 행위이지만 의료행위는 자동차 운전보다 훨씬 더 위험성이 높은 행위이다. 주사나 수술 등의 의료행위는 본질적으로 사람의 신체에 대한 침해를 수반하는 데에 비해 자동차 운전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신체에 대한 침해를 수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피해자에 대한 충분한 배상을 조건으로 교통사고에서보다 의료사고에서는 의료인에 대한 형사처벌의 특례를 좀 더 넓게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운전행위와 다른 의료행위의 성격상 중상해가 발생해도 의료인이 형사소추를 면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의료인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의료인의 안정적 의료행위가 가능하고, 의료인이 안심하고 의료행위를 할 수 있어야 국민이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에서 심의 중인 법률안에도 이러한 지혜를 담기를 기대해 본다.

오영근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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