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기업 국가 할 것 없이 인간이 관련된 모든 일에는 흥망성쇠가 있다. 로마나 몽골, 대영제국도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며 나폴레옹, 히틀러, 마오쩌둥의 치세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기업의 흥망성쇠는 특히 급격한데 GM AIG 씨티 소니 코닥 도요타 등 세계 정상에서 불과 1, 2년 만에 몰락한 기업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강자의 급격한 몰락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다양한 경쟁력을 가진 강자가 약자에 비해 계속 우위를 유지하기 쉽기 때문이다. ‘레드퀸 경쟁과 게으른 강자(Red Queen Competition & Lazy Monopolist)’ 이론은 강자의 몰락이라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레드퀸 경쟁은 라이벌 간에 한쪽의 발전이 다른 쪽의 발전을 촉진하여 경쟁적으로 함께 진화하는 일을 의미하는데, 이런 현상이 레드퀸으로 불리는 것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편에 나오는 일화 때문이다. 앨리스가 자기를 해치려는 빨간 옷의 지하세계 여왕 레드퀸을 만나자 혼비백산하여 달아난다.
한참 도망친 앨리스가 레드퀸을 따돌렸으리라 생각하고 뒤돌아본 순간 자기 옆에 그대로 있는 레드퀸을 보고는 놀라 외친다. “당신에게서 도망치려고 온 힘을 다해 한참을 달렸는데 어떻게 한 걸음도 멀어지지 않았나요”라고 묻자 레드퀸이 이렇게 답한다. “너는 빠른 속도로 앞으로 뛰었지만, 네가 뛰고 있는 길은 너보다 더 빠른 속도로 뒤로 움직이고 있어. 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으려고만 해도 최소한 길만큼 빨리 뛰어야 하고,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고 싶으면 길보다 빨리 뛰어야 해.” 숨가쁘게 달려 경쟁력 찾은 한국
레드퀸 현상은 경쟁상황에서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전략은 결과적으로 퇴보를 초래함을 일깨운다. 자신은 가만히 있어도 라이벌이 계속 앞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강자가 역설적으로 레드퀸 경쟁에 뒷덜미를 잘 잡히는 이유는 ‘게으른 강자 증후군’ 때문이다. 경쟁이 2회전에 걸쳐 벌어진다고 가정할 때 1회전에서는 우월한 경쟁력을 가진 강자가 라이벌을 압도한다. 그 상태 그대로 2회전에 돌입하면 치명적 위험에 처할 것이 뻔한 라이벌은 필사적으로 근본 혁신을 시도해서 새로운 경쟁력을 개발한다.
반면 현재의 경쟁력 덕분에 라이벌을 압도한 강자는 혁신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게으른 강자 증후군’에 빠져 기존 경쟁력 그대로 2회전 경쟁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2회전에서는 강자가 1회전 때 가졌던 경쟁력에 대처하기 위해 혁신을 시도한 라이벌 때문에 1회전 때 경쟁력을 그대로 들고 나온 게으른 강자가 오히려 위기에 처한다.
우리나라 또한 레드퀸과 게으른 강자 현상에서 예외가 아니다. 광복 후 우리나라는 우리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 등 강자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그 결과 스포츠나 한류의 예가 보여주듯 여러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세계적 강자의 반열에 한쪽 발을 담그기만 했을 뿐인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써 게으른 강자 증상이 눈에 띄어 심히 우려된다. 스포츠 분야에서 우리가 배웠던 일본을 추월하는 데 성공했으나 잠시 느슨해진 사이 중국에 다시 추월당한 바둑이나 쇼트트랙, 양궁이 그러한데 가장 심각한 분야는 경제이다. 대표적 예가 이동통신이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나라 이동통신은 과감한 혁신으로 선발주자였던 미국과 일본 업체를 제치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 삼성 LG SK KT 등 기기업체와 통신업체는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창조적이고 기발한 제품과 서비스를 쏟아내며 글로벌 이동통신의 혁신을 주도했으며 우리나라는 전 세계 이동통신 업체가 새로운 혁신을 실험해보는 테스트 시장 역할을 했다. IT등 순간의 방심에 주도권 흔들
정상에 오른 우리 기업은 게으른 강자의 덫에 빠져 차세대 이동통신인 스마트폰의 가능성을 무시했고 스마트폰이 대세가 되자 하루아침에 주도권을 상실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아이폰과 블랙베리폰이 서비스되지 않는 유일한 산업국가라는 놀림을 받게 되었다. 지난달 비즈니스위크지 인터넷판에는 ‘한국의 이동통신 산업은 이제 흥미롭지 않다’는 기사가 헤드라인으로 실리기까지 하였다. 레드퀸과 게으른 강자의 전형적 예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최근 세계적 경쟁력을 가지게 된 다른 분야에서도 재발할 여지가 많다. 창조적 항구 혁신이 게임의 룰인 21세기는 레드퀸의 원리가 어느 때보다 강하게 작용하는 시대이다. 21세기에는 어떤 성공을 거두더라도 ‘축배를 들 시간은 1000분의 1초에 불과하다’는 델컴퓨터 창업자 마이클 델의 말처럼 레드퀸과 게으른 강자의 교훈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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