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겨울, 나는 소중한 사람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헌칠하고 늠름한 F-5 전투기 조종사였다. 나의 아버지가 대대장을 지낸 강릉기지 모 비행대대 소속이었던 그 청년장교는 공군사관학교 수석 졸업자로 탁월한 비행실력과 성실함으로 신망이 높았다. 비행이 끝나면 만삭이 된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며 고된 임무의 피로를 씻던 신혼의 가장이었다. 비행기 마니아이자 조종사 지망생이었던 13세 초등학생에게 아저씨는 영웅이었다. 나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비행기에 대해 묻곤 했고 아저씨는 조카 대하듯 설명해 주었다.
“원익아, 비행 다녀와서 보자.” 출근길 그의 한마디가 마지막 인사말이었다. 땅거미 진 활주로에 서서 여러 날을 기다렸건만 그는 영원히 하늘나라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푸른 정복을 입은 동기 조종사들이 몇 번이나 발길을 돌리다 부인에게 마침내 비고(悲告)를 전했다. 부른 배를 부둥켜안고 부인은 거듭 실신했다. 내 어머니와 다른 조종사의 부인들도 서로 끌어안고 오열했다.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망자는 애기(愛機)와 함께 산화했기에 살점과 머리카락 몇 개만 겨우 찾았다고 했다. 부인은 “시신을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부인의 친정어머니가 울음바다가 된 관사에서 혼수상태의 딸을 끌듯이 데려갔다.
영결식장에서 누군가 “배우고 익혀서 몸과 마음을 조국과 하늘에 바친다”란 공사 교훈을 낭독했다. 아버지는 “남자는 태어날 때, 아비가 죽었을 때, 조국이 망했을 때 세 번 운다”고 당부했건만, 소년인 나는 울음보를 놓아 버렸다. 13세 꼬마의 영웅이었던 아저씨 영결식장서 마주한 또다른 ‘鳥人’ 반복되는 비극 더는 없어야
그 일은 어깨의 불주사 자국처럼 나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그런데도 전투기 조종사가 되겠다는 꿈은 ‘요절’하지 않고 오히려 깊어만 갔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해보겠다는 긍지와 멸사봉공하는 ‘하늘 사나이’ 정신에 매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력 저하로 조종사의 꿈을 접고 대신 항공 저널리스트가 돼 종종 전투기를 타고 하늘에 오를 때마다 지금도 창공을 날고 있을 것만 같은 아저씨의 명복을 빌고 있다.
지난 토요일 아침, 이번 F-5 전투기 사고로 순직한 조종사들의 영결식에 참석했다. 화끈거리는 기억이 각인된 강릉기지를 어른이 되어 다시 찾은 것이다. 나는 다시 소년이 되어야 했다. 아버지도 “가면 울 것 같으니 네가 가서 대신 명복을 빌어주라”고 했다. 사람도 울고 하늘도 울었다. 하염없이 뿌리는 차가운 봄비 속에서 나는 아저씨의 환영을 보았다. 자신의 뒤를 따라 하늘의 품에 안긴 후배들을 슬픈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듯했다.
“못 다한 너의 꿈…네가 남기고 간 분신(아이)은…우리가 지켜주겠다….” 동기들은 몇 차례나 끊어졌다 이어지는 조사를 읽어 나갔다. ‘같은 길을 가는 자’만이 아는 슬픔이 비 뿌리는 하늘로 피어올랐다. 조인(鳥人)의 청춘은 그런 것이다.
슬픔만큼 놀라웠던 것은 정황이 21년 전과 닮아 있다는 점이었다. 같은 전투비행대대, 같은 기종, 공사 수석졸업, 만삭의 아내…. 마지막 가는 남편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어 보지도 못한 부인들,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자라야 하는 아이들. 20년의 세월이 어떻다는 것을 알기에 모든 것이 안타까웠다. F-5는 1974년부터 도입한 것이라 영결식에 참석한 상당수의 조종사보다 나이가 많다.
영화 ‘워낭소리’가 생각났다. 공군에는 끝없이 젊은이들이 뛰어들고 있다. 이들은 젊은데 소는 지치고 나이 들었으니 세대가 맞지 않는다. 또 한번 불주사를 맞은 듯 내 가슴은 마구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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