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정훈]거리의 육식동물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10일 03시 00분


“우리 집 강아지가 아픈데 한번 봐 줄래?” 집 근처 편의점 앞에서 만난 30대 후반의 아저씨가 건넨 말에 10세, 8세의 두 여자 어린이는 아무 의심 없이 그의 집으로 따라갔다. 이후 그는 마치 맹수가 어린 초식동물을 덮치듯이 두 어린이에게 성폭력을 가했다. 실종된 두 어린이는 두 달 반 뒤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꼭 2년 전인 2008년 3월 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안양 초등생 살해사건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1994년 미국 뉴저지 주 해밀턴 타운십에 살던 7세 여자 어린이 메건 캔카는 “강아지를 주겠다”는 이웃 주민 제시 티멘디쿼스의 꼬임에 넘어가 성폭행당한 뒤 살해됐다.

어린이의 천진난만함을 유인책으로 역이용했다는 것 말고도 두 사건은 공통점이 많다. 성범죄 전력이 있는 이웃 주민에 의해 범행이 저질러졌고, 두 사건 모두 한국과 미국에서 아동 성범죄에 일대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에서는 성범죄자를 ‘섹슈얼 프레더터(Sexual Predator·성 맹수 또는 성적 육식동물)’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화됐다. 한국의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요원들도 “아동 성폭행의 특징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공격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두 나라 모두 사건 직후 성범죄자 처벌이나 감시를 강화하는 법안들이 만들어졌다. 사랑스러운 딸을 잃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 메건 캔카의 부모는 “위험한 성적(性的) 육식동물이 이웃에 이사를 왔다면 자녀가 있는 주변의 모든 부모는 이를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요구했고, 40만 명이 이에 동조하는 서명을 했다. 피해자의 이름을 딴 ‘메건법’은 여론의 힘을 업고 89일 만에 뉴저지 주 의회에서 통과됐다. 현재 우리 국회에 계류돼 있는 성범죄자 신상정보를 해당 지역사회 주민에게 우편으로 통보한다는 것과 비슷한 취지의 법안이다.

안양 초등생 살해사건이 벌어진 뒤 우리 정부와 국회도 신속하게 성폭력범죄처벌 및 피해자보호특별법 등을 개정했다. 그러나 13세 미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대한 형량을 높이고,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기간을 5년에서 10년으로 늘린 것뿐이었다. 더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대책은 뒤로 미뤄졌다. 성범죄자 신상정보를 인터넷에 공개하는 것은 2009년에 와서야 법이 개정돼 올해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8세 여자 어린이를 잔혹하게 성폭행한 일명 ‘나영이 사건’으로 더 강력한 이런저런 법안들이 제출됐지만, 잠시 들끓었던 여론이 잦아들자 법안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국회에 그대로 처박혔다.

범죄의 위험은 바로 언제라도 나와 나의 가족, 그리고 이웃에게 벌어질 수 있다는 현존하는 위협이다. 몇 %의 가능성이 있다, 없다 하는 식의 확률 게임이 아니다. 설마 나에게 그런 불행이 닥치겠느냐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공식 통계로만 한국에서 하루 평균 3명의 아동이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

더 무서운 것은 쉽게 분노했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일이 되풀이되면서 생겨나는 불감증이다. 제2, 제3의 안양 초등생과 나영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불과 2년 전, 몇 달 전의 다짐은 어디로 간 걸까. 이유리 양의 죽음 앞에 우리가 할 말이 없는 이유다. 지금도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육식동물’들은 당신의 딸, 우리의 딸들을 노리고 있다.

김정훈 사회부 차장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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