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미석]지금 즐기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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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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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비어 있다. 그림도 조각도 오브제도 없다. 로비에서 젊은 남녀가 슬로비디오 화면처럼 느리고 진한 포옹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퍼포먼스를 지나쳐 2층 램프로 올라서는데 불쑥 어린 소년이 다가와 묻는다. “무엇이 진보라고 생각하세요?”

몇 마디 얘기를 나누던 아이는 어디선가 나타난 10대 소녀 앞에서 방금 전 대화를 요약해 들려주곤 사라진다. 소녀와 걸으며 잠시 이야기하는데 다시 중년 여인이, 다음엔 노인이 차례로 다가와 새로운 대화를 이어간다.

뉴욕서 만난 놀이 같은 미학

지난주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관람’한 영국 태생의 젊은 작가 티노 세갈의 개인전은 신선한 체험이었다. 그는 물질적인 것을 만들지 않고 그저 사람들과 소통하고 토론을 유도하는 관객 참여형 작업을 한다. 실물이 남지 않으니 사고팔 일도 없을 법한데 뉴욕현대미술관 등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 중이다.

역시 뉴욕의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노장 개념미술가 마이클 애셔의 작업은 한술 더 뜬다. 전시장에 작품은 안 보이고 쪽지가 붙어 있다. ‘비엔날레 기간 내내 24시간 미술관을 열어두는 것’이 그의 작품이다. 단, 경비 문제로 주최 측은 폐막 즈음 3일만 ‘작품’을 허락했다.

봉이 김선달이 현대에 태어났으면 개념미술가로도 성공하겠다 싶을 정도로 이들 작품은 색다르다.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준다. 작품 이해와는 별개로 그 기발하고 엉뚱한 창의력은 인상적이다. 동시대 미술계는 주어진 틀을 떨쳐버린 작가들로 넘쳐난다. 이들의 창작 과정은 경직된 틀에 갇힌 노동이기보다 흥미로운 게임처럼 즐거운 몰입에 가까워 보인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란 책에서 자신이 한 거짓말을 공개했다. 인터뷰 때마다 “크리스마스와 독립기념일과 내 생일만 빼고 날마다 글을 쓴다”고 말했으나 사실은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집필한다는 것이다. 그는 “가장 바람직한 글쓰기는 일종의 영감이 가득한 놀이”라며 “나는 일 안 하는 거야말로 진짜 중노동이다. 글 쓸 때가 오히려 놀이터에서 노는 기분”이라고 털어놓는다.

진지한 태도를 잃지 않으면서도 즐기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 어디 예술만 그럴까. 올림픽 금을 딴 김연아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브라이언 오서 코치로부터 스케이트를 ‘즐기는 법’을 터득한 것이라고 한다. 화난 듯 굳은 표정으로 연습하던 소녀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면서 고된 훈련은 물론이고 경기를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현대그룹을 세운 고 정주영 회장은 오전 3시에 잠에서 깬 것으로 유명하다. “그날 할 일이 즐거워서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고민만 하는 상상력이 당할까

목표를 향해 달려가느라 과정을 즐길 여유가 아쉬운 한국사회. 광화문 가림막을 만든 재미 설치작가 강익중 씨는 유학 시절 첫 수업에서 교수가 던진 질문을 생생히 기억한다. “지금 (작업을) 즐기고 있나요(Are you enjoying)?” 한국에선 늘 “요즘 고민 좀 하나?”라고 묻던 것과 사뭇 달랐다. 작업은 즐겨야 한다는 걸 깨달은 뒤 그의 상상력엔 날개가 달렸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일찍이 공자는 말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고 하지만, 즐겁지 않다면 뭔가에 빠져들거나 꿈에 이르기도 힘들 것이다(不樂不及). 삶의 무게 속에서도 가끔은 질주를 멈추고 자문할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즐기고 있는가?”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킬 일/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허영자의 ‘나팔꽃’)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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