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조창호와 백선엽의 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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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1일 20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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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국립극장에서 연극 ‘아, 나의 조국!’을 관람했다. 6·25전쟁 때 북한에 억류됐던 국군포로 가운데 최초로 귀환에 성공한 조창호 중위(1930∼2006)를 다룬 작품이다. 1994년 조 중위가 북한을 탈출해 43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을 때 한국 사회에는 큰 파문이 일었다. 그의 슬프고도 파란만장했던 인생 스토리가 6·25를 기억하고 있는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한국 사회가 잊고 살았던 국군포로에 대해 관심이 증폭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 중위는 다시 잊혀지고 있다.

연극이 살려낸 ‘잊혀진 영웅’

올해 6·25전쟁 60년을 맞아 그를 다시 대중 앞에 불러낸 사람은 소설가 복거일 씨다. 복 씨는 이 연극의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 그는 “2006년 조 씨가 타계했을 때 영결식이 재향군인회가 주관하는 향군장으로 치러진 것이 너무 애통해 연극을 만들게 됐다”고 했다. 노무현 정권은 조 씨의 장례에 무관심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전쟁 영웅’ 조 중위의 장례는 마땅히 국가기관이 나서 국군장이나 육군장으로 치러야 했다고 복 씨는 강조한다.

연극에는 감동적인 장면이 적지 않다. 북한에서 생활할 때 조선족을 통해 꿈에 그리던 어머니의 사진을 전해 들고 조 씨는 오열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뒤였다. 한국에 돌아온 직후 국군병원에서 국방부 장관에게 귀환 신고를 하는 장면은 다시 한 번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육군 소위(나중에 중위로 진급함) 조창호. 군번 212966. 무사히 돌아와 장관님께 귀환 신고합니다.”

김대중 정권 때 조 씨가 국군포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갖던 날, 집 앞에서 기관원들이 막아섰다. “기자회견은 국가에 중대한 위협이 되는 일”이라고 기관원들이 말하자 조 씨는 “난 다만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을 데려와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데 그게 어떻게 위협이 되느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외친다. “이것이 제가 북한 땅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조국입니까. 나라를 지키다 적군에게 붙잡혀 지옥 같은 땅에서 살아온 국군포로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나라를 과연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번 공연에는 노병(老兵)들이 많이 관람했다. 6·25의 전세를 바꿔놓았던 백선엽 장군도 찾았다. 연극이 끝난 뒤 즉석 행사가 있었다. 극중에서 조 중위 역할을 한 배우가 90세의 백 장군을 앞에 모셔놓고 귀환 신고를 했다. 백 장군은 경례로 답했다. 지켜보던 관객, 배우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백 장군은 “6·25 때 우리 선배들의 위대한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 씨가 남한에서 결혼한 부인 윤신자 씨도 이 공연을 보기 위해 미국 시애틀에 살다가 귀국했다.

공연 내내 숙연함이 이어졌다. 시종 눈물이 났다는 관객도 있었다. 연극은 조 씨의 삶과 고통을 생생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예술이 지닌 힘이다. 하지만 우리 문화계에는 6·25와 북한을 다룬 작품이 별로 없다. 특히 북한을 비판하는 시각에서 접근하면 ‘반공(反共)예술’이나 ‘의식 없는 작가’로 평가 절하되기 일쑤였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다룬 뮤지컬 ‘요덕 스토리’가 국내 예술가가 아닌 탈북자들에 의해 제작된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들만 기억하는 6·25 60년 안돼야

올해 6·25를 기념하는 여러 사업이 준비되고 있으나 당시의 삶과 역사를 형상화한 예술 창작은 찾기 어렵다. 정부가 마련한 사업에도 예술 행사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와 보니 관람객 대부분이 나이 드신 분이었다. 정작 이런 작품을 꼭 봐야 할 사람은 6·25를 모르는 젊은 세대가 아닌가. 그들만의 행사로 치르고 넘어가기에는 우리 사회가 조창호 백선엽 같은 영웅들에게 진 빚이 너무 크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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