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승련]‘공천기준 완화’ 다같이 침묵하는 정치권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12일 03시 00분


벌금형이상→금고형이상
한나라 슬그머니 당규 개정
민주당 누구도 비판 안해
안희정-이광재 등 의식한듯

정당 취재기자들이 일하는 국회 기자실(정론관)은 총성 없는 전쟁터다. 상대 정당을 정조준해 자극적인 공격을 퍼붓는 의원들의 발길이 하루 내내 이어진다. 그러나 요 며칠 여야 정치권에서는 ‘때론 상대의 허물에도 침묵할 수 있다’는 새로운 장면이 목격됐다.

한나라당은 지난달 26일 상임전국위원회의를 열어 당규를 개정해 비리혐의 확정자 공천기준을 느슨하게 고쳤다. 법원에서 벌금형 이상의 판결이 확정된 사람은 공천할 수 없다는 당규 3조2항을 ‘금고(禁錮)형 이상’으로 고쳤다. 또 “사면됐다면 금고 이상도 문제없다”는 취지의 조항도 삽입했다. 특정인을 염두에 둔 조치인지는 확인할 길 없으나 이번 개정으로 과거 집행유예 후 사면을 받은 김현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과 벌금형을 받은 김무성 의원 등이 2012년 총선 공천신청 자격을 회복했다.

이런 당규 개정은 10일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한나라당은 회의 자료집을 발간했지만 이 내용을 짤막하게만 다뤘기 때문에 꼼꼼히 읽어보기 전에는 찾기 어려웠다. 당 차원의 설명은 일절 없었다.

“밀실 공천을 없애겠다”는 한나라당의 선언은 이로써 빛이 바래게 됐다. 공천기준 작성과정은 밀실에서 이뤄졌고, 한나라당은 언젠가 알려질 사안임에도 감추려 했다.

하지만 기자를 더욱 갸우뚱하게 만든 것은 ‘한나라당 공격 포기’로 비치는 민주당의 침묵이었다. 평소라면 대변인 논평, 당 대표와 원내대표의 아침 회의 공개발언 등으로 집중포화를 날릴 만한 사안이다. 한나라당이 성희롱 혐의가 확정된 우근민 전 제주지사의 민주당 복당에 직격탄을 날린 직후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첫 보도 후 36시간이 지나도록 민주당 어느 누구에게서도 한나라당 비판은 나오지 않았다.

11일 민주당 당직자들을 접촉하면서 속사정을 가늠할 수 있었다. 민주당 내에서는 “안희정 최고위원, 이광재 의원 등 6·2지방선거 공천 유력자의 과거 전력이 민주당이 침묵을 지키는 이유”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한나라당의 공천기준 완화를 비판하면 집행유예(이 의원은 2심 진행 중)를 선고받은 두 정치인을 공천하려는 민주당 지도부의 계획이 복잡해진다는 게 여러 당직자의 견해였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당의 침묵이 마땅치 않은 듯했다. 그는 기자에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언론이 (민주당의 무비판을) 기사로 써 달라. 그게 언론의 역할 아니냐”고 말했다.

여야는 앞서 공직선거법 위반 때 의원직 상실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인 벌금형 100만 원을 300만 원으로 느슨하게 바꾸려다가 여론의 질타를 받고 물러섰다. 하지만 여야 지도부 어느 쪽도 이 사안을 놓고 “우리가 이래선 안 된다”는 자기비판을 한 바 없다. 의원들의 이런 요구에 고민해 온 김충조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줄곧 “이런 사안은 의원들에게만 맡기면 안 된다”는 말을 해 왔고, 이달 초 스스로 사임했다.

김승련 정치부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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